“고문관 ××” “군바리 주제에” 안에서도 밖에서도 대못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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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1부>나는 동네북이 아닙니다
조롱-모욕 시달리는 군인들

“야, 젖 집어넣어!”

해병대 1사단에서 복무하다 최근 전역한 김모 씨(30)는 아직도 선임들이 던지던 폭언이 귓가에 맴돈다. 김 씨는 일반 남성보다 가슴이 큰 체형이다. 당직사관과 선임들은 매일 점호 시간 때 가슴을 펴고 정자세로 서 있던 김 씨에게 서슴없이 언어폭력을 가했다. 김 씨는 “샤워를 할 때도 항상 놀림거리였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군 내 언어폭력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 고질병으로 꼽힌다. 국방부는 지속적으로 근절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군 내 언어폭력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 “대가리 큰 놈이 일도 못하냐”

충북 충주의 한 탄약창에서 근무하다 최근 전역한 이모 씨(30)는 아직도 군 생활을 떠올리면 치욕감에 손이 떨린다. 이병 시절 어느 날 이 씨는 일과 후에 정자세로 ‘각’을 잡고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선임 병사가 다가와 느닷없이 “너 참 대가리 크다. 생긴 게 뭐 그따위로 생겼냐”고 막말을 던졌다. 철모가 머리에 잘 맞지 않을 때도 “대가리가 얼마나 크면 안 들어가냐”고 놀려댔다.

선임들의 조롱으로 주눅이 든 이 씨는 업무 중에 실수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얼굴도 못생긴 게 일도 못하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이 씨는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외모를 비하하며 무능력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탈영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욕설과 폭언 대신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있었다면 군 생활이 그렇게 견디기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최근 해병대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김모 씨(31)는 서울 출신인데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목소리가 크고 억양이 센 경상도 사투리를 썼던 선임자에게 계속 괴롭힘을 당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사투리가 입에 밴 것이다. 김 씨는 “더 놀라웠던 것은 선임에게 당했던 대로 똑같이 후임에게 권위적으로 보이려고 사투리로 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회상했다.

전문가들은 군대의 언어폭력은 계급사회라는 위계질서 속에서 하급자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낳은 병폐라고 지적한다. 하급자의 복종을 유도하기 위해 뭐라도 트집을 잡으려 하다 보니 부대 내에서 수행하는 업무와 관련된 일부 행동만 보고 조그만 실수도 그 사람의 전체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한마디로 ‘고문관’ 또는 ‘낙오자’라는 낙인을 너무 쉽게 찍는 경향이 크다.

○ 자살로 이어지는 군 언어폭력

지난해 7월 육군 31사단에서 김모 일병(22)이 K2 소총에서 발사된 총탄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헌병대는 김 일병의 부대 장병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일부 선임병이 김 일병을 포함한 후임병들에게 폭언이나 욕설을 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강원 화천군 소속 부대 인근에서 오모 대위(28·여)가 상관이었던 노모 소령(37)의 성적 폭언에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오 대위의 유서가 담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에는 “하룻밤만 자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처럼 폭언은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송영근 새누리당 의원이 발표한 ‘군우울증 유병률(어느 시점에서 조사 대상 인구 중 환자 비율) 조사’에 따르면 국방부가 군 장병 131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자살을 생각한 군인 비율이 9.3%였다. 자살을 계획한 장병은 1.8%, 자살 시도까지 한 경우는 1.2%였다.

자살의 원인으로는 폭언 등 병영 부조리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 조사에서 장병들의 우울장애 유병률은 4.6%였다. 자살 관련 행동을 보인 군 장병들 중 50% 이상이 정신질환을 앓았다. 우울장애가 심한 장병들은 자살 관련 행동이 5.3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 “군바리가 뭘 알아”

군의 수준을 비하하는 시각이 만연한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많았다. 공군에서 17년째 복무 중인 최모 소령(40)은 요즘 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일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줄었다. 일이 바빠져서가 아니다. 술이 몇 잔 오가고 나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 보면 거의 매번 무시를 당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지난해 화제가 됐던 세제(稅制)개편안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한 친구가 옆 테이블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목소리로 ‘군인이 뭘 아냐’며 무시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해병대에서 근무하는 이모 중령(42)은 “일반 유치원에 딸을 입학시켰는데 어느 날 퇴근해서 와보니 아내가 울고 있었다”면서 “왜 우냐고 물어봤더니 ‘군바리 딸이 유치원에 왔다고 다른 학부모들이 말하는 걸 들었다’고 했다”며 말끝을 흐렸다.

홍두승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을 때 군이 국민의 신뢰를 잃은 후 군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불신의 뿌리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군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민과의 접점을 늘려야 한다”며 “보안 수준이 낮은 군 시설은 시내 빌딩에 입주해 민간 기업이나 기관과 함께 쓰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심규선 ksshim@donga.com·정성택 기자
#군대 언어폭력#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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