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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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통곡의 땅’ 르포
강진 덮친 마라케시엔 먼지 가득
산사태로 고립된 산악지대 마을
“도움 절실한데 정부-구조대 없어”

가족 잃은 슬픔 규모 6.8 강진이 발생한 모로코 중부 마라케시 물라이브라힘 마을에서 지진으로 가족을 잃고 통곡하는 여성을 이웃들이 안아주며 
위로하고 있다. 아틀라스산맥 고원지대에 있는 이 마을은 지진 진앙과 가까운 데다 내진 설계가 안 된 건물이 대부분이어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마을로 통하는 도로가 끊겨 구조대와 중장비 접근이 어려워 생존자 수색과 구조가 난항인 가운데 주민들은 맨손으로 
건물 잔해에서 사망자들을 끄집어내 장례를 치르고 있다. 마라케시=AP 뉴시스
가족 잃은 슬픔 규모 6.8 강진이 발생한 모로코 중부 마라케시 물라이브라힘 마을에서 지진으로 가족을 잃고 통곡하는 여성을 이웃들이 안아주며 위로하고 있다. 아틀라스산맥 고원지대에 있는 이 마을은 지진 진앙과 가까운 데다 내진 설계가 안 된 건물이 대부분이어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마을로 통하는 도로가 끊겨 구조대와 중장비 접근이 어려워 생존자 수색과 구조가 난항인 가운데 주민들은 맨손으로 건물 잔해에서 사망자들을 끄집어내 장례를 치르고 있다. 마라케시=AP 뉴시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북아프리카 모로코 남서부 일대에서 규모 6.8의 강진이 발생한 지 나흘째인 11일(현지 시간) 기자가 찾은 마라케시 구도심은 여전히 희뿌연 먼지로 가득했다.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눈앞의 잔해 속에 묻혀 있어도 꺼낼 엄두를 못 내 바라만 보는 상황이라고 주민들은 전했다.

이날 기준 2497명이 숨진 가운데 생존자를 구할 수 있는 72시간의 골든타임이 끝나가지만 구조의 손길은 거의 닿지 않고 있다. 피해가 집중된 아미즈미즈 등 산간 지역 주민들은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고 있다”면서 지원을 호소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10일 보도했다. 아틀라스의 한 산간 마을에선 남성 5명이 흙더미와 벽돌만 남은 집터에서 잔해에 깔린 가족을 찾기 위해 곡괭이로 땅을 파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남성들은 2개뿐인 곡괭이를 돌려 쓰며 거대한 흙더미를 파헤쳤다”고 전했다.

맨손으로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끌어내던 압델자릴 람그라리 씨(33)는 “누군가가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NYT에 말했다. 주민 압데사마드 아이트 이히아(17)는 “우리에겐 도움이 너무 필요한데 정부나 구호요원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11일(현지 시간)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무너진 건물 벽돌 및 잔해 복구 작업 중인 인부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11일(현지 시간)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무너진 건물 벽돌 및 잔해 복구 작업 중인 인부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인근 마을의 라치드 부아디 씨 역시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주민들과 시신 9구를 수습하는 동안 구조 당국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는 “슬픔에 피로가 겹쳐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겠다는 마음이 식어 가고 있다. 식수와 음식이 동났고 전기도 끊겼다”고 말했다.

8일 발생한 지진은 험준한 산악 마을을 집중 강타해 구조대의 접근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진 잔해와 낙석으로 도로까지 끊겨 헬기를 동원해야 하는 실정이다.

지진 발생 직후 프랑스, 미국, 이스라엘, 대만, 알제리 등 여러 국가가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모로코 정부는 “구조 작업에 혼선이 생길 수 있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재 우호국인 스페인, 카타르, 영국, 아랍에미리트(UAE) 등 4개국의 지원 제안만 받아들인 상태다.

해외 정부와 민간단체들이 “구조대를 당장 파견할 준비가 돼 있다”며 나서도 모로코 당국은 “아직 국왕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입장을 반복하며 골든타임을 허비하고 있다. 국왕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통치가 유지되는 모로코는 국왕이 국정을 지휘한다. 국가 위기 시 국왕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지만 모로코 국왕 모하메드 6세는 8일 밤 지진이 났을 때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그는 지진 발생 12시간 뒤에야 “군대에 구조를 지시했다”는 짤막한 성명만 발표하는 등 늑장 대응했다.

40시간 지나도 구조대 안와… 구급차 없어 오토바이로 환자 이송


[모로코 120년만의 강진]
“구조 혼선 우려” 4개국 지원만 승인
사상자 현황 등 정보 공개도 미적
‘철권 국왕’ 탓 정부 역할 소극적
11일(현지 시간) 기자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모로코 마라케시 내 구도심 메디나를 둘러보니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들이 곳곳에 있었다. 주민들은 건물들을 보며 “내 삶의 모든 게 무너져버렸다”고 한탄했다. 8일 발생한 모로코 강진에 따른 
인명 피해는 11일 기준 사망 2497명, 부상 2476명으로 집계됐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11일(현지 시간) 기자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모로코 마라케시 내 구도심 메디나를 둘러보니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들이 곳곳에 있었다. 주민들은 건물들을 보며 “내 삶의 모든 게 무너져버렸다”고 한탄했다. 8일 발생한 모로코 강진에 따른 인명 피해는 11일 기준 사망 2497명, 부상 2476명으로 집계됐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모로코 마라케시 인근 아틀라스 산간 마을 주민들은 여진 공포가 이어지는 가운데 사실상 ‘정부의 부재’ 상태가 이어지자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아미즈미즈 지역에 지진 발생 40시간이 지나도록 구조대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WP는 “이미 지진으로 약해진 구조물이 여진으로 잇따라 붕괴되며 마을에는 분노와 절망이 감돌았다”고 전했다.

구급차가 없어 부상자들도 자가용이나 오토바이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구조대를 기다리다 지친 주민들은 한 모로코 군인을 향해 “대혼돈에 빠졌다”며 따지기도 했다. 가족들과 거리로 대피해 이불을 깔고 있던 물라이 알리 아주아드 씨는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받은 도움은 외국 친척이 보내준 돈뿐”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에 말했다.

● 지진 48시간 뒤에야…정부 늑장 브리핑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주민들은 정부의 구조 공백을 스스로 메우고 있다. 지진 잔해에 일부 도로가 막혀 차량 운행이 어렵게 되자 이웃 마을 주민들은 당나귀에 이불, 식수, 기저귀 등을 실어 피해 지역으로 보내고 있다. 한 시민은 물과 음식 등 구호품을 전달하기 위해 마라케시에서 고립된 시골 마을까지 32km를 직접 걸어갔다고 카타르 국영 알자지라 방송이 전했다.

모로코 북부 해안도시인 카사블랑카나 진앙에서 600∼700km 떨어진 북부 도시 페스 등에서도 시민들이 구호품과 의료품을 실은 차를 몰고 마라케시 및 산간 지대로 나서고 있다. 11일 동료 20여 명과 피해 지역 위르간으로 향한 압델아지즈 씨는 기자에게 “피해 지역에 베이스캠프를 꾸리고 2주 이상 머물며 구조에 동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부 주민들은 전기가 끊기고 수도가 고장나 10km 가까이 떨어진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왔다. 모로코 전문가인 사미아 에라주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모로코의 경우 도시를 벗어나는 순간 주민들이 중세 시대 환경에 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하루하루 근근이 사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자연재해가 덮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이런 상황에서 수십 개 국가와 국제 구호단체들이 모로코 정부의 승인을 기다리느라 지진 현장에 투입되지 못하고 있다. 올 2월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때 구조 활동을 했던 비영리단체 ‘국경없는 구조대’는 프랑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모로코가 해외 단체에 구조 권한을 부여하지 않아 구조작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모로코 정부의 늑장 대응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정부의 첫 공식 브리핑은 지진 발생 약 48시간 만인 10일 밤에야 이뤄졌다. 구조 활동이나 사상자 현황 등 기본적인 정보 공개도 제때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철권 국왕’ 제도가 구조 시스템 방해

10일(현지 시간) 모로코 중부 마라케시 물라이브라힘 마을에서 주민들이 8일 심야에 발생한 규모
 6.8 강진으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사이를 위태롭게 걸어가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0일(현지 시간) 모로코 중부 마라케시 물라이브라힘 마을에서 주민들이 8일 심야에 발생한 규모 6.8 강진으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사이를 위태롭게 걸어가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정부 대처가 미흡한 배경으로는 모로코 특유의 국왕 중심 중앙집권 통치 구조가 꼽힌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2004년 모로코에 지진이 났을 때도 ‘총리는 국왕보다 먼저 나서지 않는다’는 원칙 탓에 총리가 피해 지역을 즉시 방문하지 못했다. 에라주키 교수는 “엄격하게 통제되고 중앙집중화된 모로코 정부의 특징이 재난 대응에 방해가 되고 있다”며 “자연재해는 초동 대응이 중요한데 국왕의 성명 발표조차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비판했다.

모로코가 국가적 자존심과 국왕의 대외 이미지를 위해 해외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인도주의 단체 ‘기아대책행동’에서 일했던 실비 브뤼넬 프랑스 소르본대 교수(지리학)는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에 “모로코는 아프리카의 신흥국으로서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자체 구조 역량을 갖췄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 주려 한다”고 말했다.

모로코에선 국왕 비판은 범죄로 규정돼 있어 대정부 규탄 여론도 형성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주민 5명 중 1명꼴로 사망자가 발생한 아미즈미즈 지역의 한 주민은 9일 “정부를 비판하면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가만히 있다가 이번 지진이 없었던 일이 될까봐 두렵다”고 일본 아사히신문에 말했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모로코#통곡의 땅#규모 6.8의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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