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군중에게서”… 下放고난 이겨내고 대륙황제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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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어떻게 권력 쥐었나

2007년 10월 22일 오전 10시 36분 중국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 1층 둥다팅(東大廳). 이날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7기 1중 전회)에서 선출된 정치국 상무위원 9명이 서열 순으로 차례로 걸어 나왔다. 10년 뒤인 25일 19기 1중 전회에서 선출된 상무위원 7명이 내외신 기자들에게 소개된 것과 장소도 상황도 같다.

2007년 당시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끌어당긴 것은 서열 6위 시진핑(習近平) 상하이(上海) 서기가 서열 7위 리커창(李克强) 랴오닝(遼寧)성 서기보다 앞서 걸어 나온 장면이었다. 당 대회 한 달 전까지도 리커창이 후계자 경쟁에서 앞설 것이라는 분석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불과 10년 전 우여곡절 끝에 리커창을 제쳤던 시 주석이 집권 2기를 맞아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사상을 당장(黨章)에 삽입하는 등 마오쩌둥(毛澤東)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그가 ‘시황제로 가는 길’에는 몇 번의 변곡점과 인생의 물줄기를 바꾸는 선택들이 있었다.

첫 번째 고비는 문화대혁명 이후 하방된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서 탈출했다 되돌아 간 사건. 부총리 시중쉰(習仲勳)의 아들로 베이징 고위층 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나고 자란 ‘금수저’ 시진핑은 문화대혁명 시절 중학교를 졸업한 뒤 1969년 16세의 나이에 옌안 량자허(梁家河)로 보내졌다. 부친이 마오의 눈 밖에 나서 낙마한 데 따른 것이다. 농촌 노동이 힘든 데다 농민들과의 관계도 원만치 않아 시진핑은 3개월여 만에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도망쳐 버린다.

그때 팔로군 출신 이모부가 “군중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타일러 시진핑을 다시 량자허로 돌려보냈다. 시진핑은 1975년 칭화(淸華)대 화공과에 합격해 베이징에 돌아오면서 7년간의 하방생활을 마쳤다. 시진핑이 량자허로 되돌아가지 않았다면 출세는커녕 두고두고 일생의 걸림돌이 됐을 것이다. 부친 문제로 시진핑은 량자허 시절 10번이나 공산당 가입을 신청했으나 거부되고 11번째에 가입했다. 군중과 함께하며 인민의 공복(公僕)이 되는 길도 배우는 등 량자허 시절은 훗날 그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 됐다. 량자허는 시 주석의 하방생활을 기념하는 ‘성지’로 조성돼 있다.

두 번째 갈림길은 시 주석이 영국 유학의 유혹을 뿌리치고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의 지방관리의 길로 들어선 것. 시 주석은 대학 졸업 후 중앙군사위원회 겅뱌오(耿飇)의 비서로 일하며 정치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첫 번째 부인 커링링(柯玲玲)은 커화(柯華) 전 주영 대사의 막내딸로 시 주석에게 함께 영국 유학을 가자고 권했다. 하지만 시 주석은 지방관리를 시작으로 지도자로 가는 길을 택하며 이를 거절했다. 이후 이상 및 성격 등이 맞지 않는 커링링과 이혼하고 아홉 살 아래의 군인 국민가수 펑리위안(彭麗媛)과 재혼했다.

시진핑이 첫 번째 부인의 권유대로 외국 유학에 나섰다면 군중과 함께해야만 하는 최고위 정치 지도자는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리커창 총리도 대학 졸업 후 유학과 공산주의청년단 간부의 길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해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에 이어 공청단의 계보를 잇는 지도자가 됐다.

세 번째는 푸젠(福建)성 스캔들. 시 주석이 푸젠성 샤먼(厦門)시 부시장을 시작으로 푸젠성장을 마칠 때까지 18년간 크고 작은 비리 사건이 잇따랐다. 800억 위안 규모의 ‘샤먼 위안화(遠華) 그룹 밀수 사건’도 터졌다. 상관이나 부하들이 대거 구속되고, 캐나다로 도주한 주모자가 시 주석과의 관계설을 퍼뜨리기도 했으나 그의 정치 인생에 제동을 걸지는 못했다. 만약 당시 비리 사건에 휘말렸다면 반부패를 명분으로 집권을 강화하고 있는 현재와 같은 지도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네 번째 고비는 리커창과의 후계자 경쟁이었다. 2007년 당 대회에서 시 주석은 리커창보다 서열이 하나 앞서 상무위원에 진입했으나 2012년 총서기에 오르는 데 우여곡절을 겪었다. 통상적으로 상무위원에 진입한 이듬해에 차기 대권을 예약하는 자리인 ‘중앙군사위 부주석’에도 올라야 했으나 2년이나 선임되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시 주석이 18차 당 대회에서 최고권력자가 되기 위한 최후의 암투를 벌였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았다. 시진핑 당시 국가부주석이 일정 기간 공개 활동을 하지 않아 ‘잠적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상당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 주석은 집권 1기 5년간 반부패 숙정을 통해 수많은 잠재적 경쟁자 등 정적들을 쳐냈다. 하지만 집권 2기를 시작하면서 노골적으로 권력욕을 드러내기보다 정교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했다. 정치국원이나 상무위원 나이 제한인 ‘7상8하(七上八下·당 대회 시기 67세면 유임, 68세 이상 퇴임)’ 불문율은 깨지 않고, 마오쩌둥 전 주석의 전유물이었던 ‘당 주석’ 칭호는 탐내지 않았다. 그 대신 뚜렷한 후계자를 상무위원회에 진입시키지 않아 격대지정(隔代指定·차차기 최고지도자를 미리 지명해 권력 승계를 안정화하는 것)의 관례를 깼다. 집권 후반의 권력 누수를 막고 장기 집권 가능성을 연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 18기 6중 전회에서 ‘시 핵심’이라는 칭호를 받아 권력 집중의 분위기를 확산시키기도 했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시진핑#중국#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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