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만에 시뻘건 불길이 통째로 삼켜… 시민들 “테러 아니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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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고층아파트 대형 화재


“어젯밤 그렌펠타워에 계셨거나 가족, 지인 중 실종되신 분 있으면 알려주세요.”

14일 오후 화마(火魔)에 밤새 휩싸였던 오래된 고층 아파트 300m 앞 건물에 도착했을 때 한 여성 경찰이 주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그의 주변에는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이 건물 안은 임시로 실종자 가족 명단을 작성하고 혹은 집이 다 타버려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구호 물품이 놓여져 있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건물은 거대한 숯검댕으로 변해 있었다. 건물 외벽을 태우면서 나온 희뿌연 연기와 사방에 흩날린 재로 건물 주변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방관이 된 지 29년이 지났지만, 이렇게 큰 화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대니 코튼 런던 소방총감은 “유감스럽게도 다수의 사망자가 나왔다”며 “건물 규모와 복잡한 구조 때문에 현재로서는 숫자를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소방당국은 화재로 최소 6명이 숨졌다고 밝혔지만 사망자는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 고요했던 새벽이 아비규환으로

런던 중서부 래티머로드에 있는 24층짜리 그렌펠타워에서 불길이 솟아오른 건 이날 0시 54분. 거주민들이 한창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였다. 2층에서 시작된 불길은 15분여 만에 아파트 한쪽 벽면 전체를 집어삼키며 순식간에 24층 꼭대기까지 번졌다.

그렌펠타워 옆에 사는 덴마크 출신 리네 스테링 씨(23)는 이날 오전 1시 30분경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이웃이 늦은 밤까지 파티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창문을 통해 본 건 사람들이 시뻘건 불길을 피해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는 모습이었다.

화재 신고 6분 만인 오전 1시경 그렌펠타워 앞에 소방차가 도착했다. 그러나 불길이 저층인 2층에서 시작해 번진 데다 연기가 함께 솟구치며 주민들의 탈출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소방관 200여 명이 현장에 출동했지만 쉽사리 건물로 진입하지 못했다. 목격자인 하딜 알라밀리 씨는 “한 남성이 도와달라고 외쳤지만 아무도 돕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목격자인 고란 카리미 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불이 난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었다”며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 “화재 경보 없었다” “스프링클러도 작동 안 한 듯”


소방당국에 따르면 그렌펠타워에는 1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현재 70여 명이 화상과 유독가스 흡입 등으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지만 주민의 상당수는 아직 생사가 확인되는 않은 상황이다. 경찰은 최대 600명이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생존자, 목격자들과 현지 언론은 이번 참사가 끔찍한 인재(人災)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렌펠타워 4층에 사는 한 남성은 영국 스카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화재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며 “누군가가 4층의 모든 현관문을 두드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건물 밖으로 피신하고 건물이 화염에 휩싸인 뒤에야 경보음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화재 초기에 불길을 잡아줄 스프링클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전직 소방관은 CNN에 “불이 빠르게 번진 것을 볼 때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화재 위험 경고했지만…

그렌펠타워는 1974년 지어진 노후 공공 임대주택으로 5년 전 리모델링 작업을 시작해 지난해 개선 작업이 끝났다. 이때 단열효과를 위해 건물 외벽에 붙인 알루미늄 합성 피복이 불길을 더 빠르게 번지게 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렌펠타워의 임대 관리업체인 켄싱턴앤드첼시임대관리회사(KCTMO)는 “엄격한 화재 기준에 따라 리모델링이 진행됐고, 각 가구의 현관은 최대 30분까지 화재에 견딜 수 있기 때문에 화재 시 다른 고지가 없으면 그대로 실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내용의 소식지를 발행해 향후 조사 과정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그렌펠타워의 입주자협회는 2013년부터 이 건물이 화재에 취약한 구조와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며 수차례 KCTMO에 문제를 제기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디크 칸 런던시장은 건물 안전관리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를 예고했다. 그는 B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런던에 수많은 고층건물이 있는데, 사전 안전권고의 부실이나 건물 안전관리 및 유지보수 미흡 등으로 입주자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화재 발생 직후 트위터에는 “(이번 화재가) 이슬람국가(IS)의 테러임이 확실하다”, “무슬림은 나가라” 등의 글이 등장했다. 최근 잇단 테러로 인한 영국인의 불안감이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민우 기자 minwoo@donga.com / 런던=동정민 특파원
#런던#화재#그렌벨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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