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바티칸의 콘돔 스캔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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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천재화가 카라바조(1573∼1610)는 그림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몰타의 수도 발레타에 있는 성요한 대성당에 가면 그가 유일하게 서명한 ‘세례 요한의 참수’(1608년)를 볼 수 있다. 로마에서 살인을 저지른 뒤 섬으로 흘러들어간 카라바조는 기사 작위를 받고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훗날 기사단에 쫓기는 신세가 되지만.

 ▷성요한 기사단으로도 불리는 몰타 기사단은 11세기 예루살렘에서 순례자 구호 등 의료 목적으로 생겨났다. 한때 지중해 로도스 섬을 정복해 독립국가로 존재했지만 오스만제국에 의해 쫓겨나 몰타로 옮겨갔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요한 대성당은 기사단이 부와 권력을 누리던 시절의 자취다. 나폴레옹의 몰타 정복으로 다시 떠돌던 기사단은 1834년 로마에 정착해 지금도 전 세계에서 의료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기사단은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국기와 자체 여권을 갖고 106개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는 등 ‘영토 없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요즘 몰타 기사단이 ‘콘돔 스캔들’을 둘러싸고 교황청과 대립 중이다. 국제구호활동으로 미얀마에서 콘돔을 배포한 것이 발단이었다. 성노예로 끌려온 매춘 여성들에게 에이즈 예방을 위해 콘돔을 나눠준 일을 문제 삼아 작년 말 기사단 수장인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이 “인공 피임을 금지한 교리에 어긋난다”며 관련자를 해임했다. ‘교황청의 뜻’이라며 강행했지만 거짓으로 드러난 거다. 바티칸 교황청은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자 기사단이 ‘주권 침해’라며 조사를 거부하는 사상 초유의 항명파동을 일으켰다.

 ▷완고한 버크 추기경과 달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임신을 피하는 것이 절대악은 아니라고 본다. 이번 콘돔 스캔들이 개혁 성향의 프란치스코 교황과 버크가 이끄는 강경파의 보혁 대립으로 해석되는 이유다. 둘은 악연이 있다. 교황은 2014년 바티칸대법원의 수장 버크를 몰타 기사단 사제로 좌천 인사를 했다. 이후 버크 추기경은 교황과 사사건건 각을 세우고 있다. 보혁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지구촌. 종교계도 예외는 아니라는 사실이 씁쓸하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몰타 기사단#콘돔 스캔들#바티칸 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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