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지방선거서 사상 첫 허용
남성 유권자엔 칸막이 뒤서 연설… 남성 가족 대동해야 메시지 전달
사우디 여성들 “여권신장과는 거리”… 정국불안-국민불만 달래기 고육책
남녀 차별이 극심한 사우디아라비아가 12일 건국 이래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보장한 지방선거를 실시한다. 하지만 여전히 장벽은 높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사우디 지방선거에 입후보한 6140명 중 여성은 14% 정도인 900여 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사우디에서 여성이 입후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들은 선거유세부터 차별의 벽이 높다. 여성 유권자에게는 직접 연설할 수 있지만 남성 유권자를 대상으로 할 때는 칸막이 뒤에서 연설하거나 ‘샤프롱’이라 불리는 남성 가족이나 친척을 대동해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대중 앞에 나설 때는 ‘아바야’(검은 망토 모양의 이슬람권 전통 의상)로 몸을 감싸고 ‘니깝’(눈만 노출시키는 얼굴 가리개)을 착용해야 한다.
리야드 지방의원 후보인 파우지아 알하르비는 지난달 29일 하마터면 선거유세를 못할 뻔했다. 쇼핑몰에서 유세 스케줄을 잡았지만 갑자기 쇼핑몰 주인이 “당신이 남자들과 얘기를 나누면 종교경찰이 시비를 걸까 봐 걱정되니 여기서 유세하지 말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알하르비는 “결국 쇼핑몰을 돌아다니지 않고 복도 끝에서 샤프롱을 대동하고 유세하기로 주인과 합의했다”고 로이터에 전했다.
영국 런던의 사우디대사관에서 10년 넘게 일한 뒤 지난해 귀국한 샤이카 알켈라이위 후보(30)는 “얼굴 사진을 내놓고 홍보하는 것이 금지돼 대신 트위터에 나와 비슷한 눈동자를 가진 이집트 여배우의 사진을 올렸다. 그런데도 선관위로부터 사진을 내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사우디 여성 13만637명은 이번에 처음으로 선거권이 생기며 유권자로 등록했다. 하지만 남성 유권자는 이보다 10배 정도 많은 135만여 명에 달한다. 남성 유권자는 남성 후보를 뽑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여성 후보가 당선될 확률은 매우 낮다.
보수 세력의 반대도 거세다. 보수 성직자 압둘아지즈 알파우잔은 “선거는 오직 남성만! 여성 참정권을 보장한 선거는 서양의 가치를 수입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화제가 됐다. 여성에게 운전할 권리를 달라며 캠페인을 벌여온 여성 후보 3명은 선관위가 반정부 인물로 분류해 선거 입후보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지방의원의 권한이 제한적인 것도 이번 선거의 한계로 꼽힌다. WP는 “지방의회는 도로 신호등, 인도 관리 등과 관련된 감독 업무를 하는 곳으로, 사우디 정치의 큰 그림을 바꿀 권한은 없다”며 “국가적 입법 권한은 없기 때문에 중요한 결정은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과 전원이 남성인 내각에서 결정한다”고 전했다.
따라서 이번 선거가 진정한 여권 신장 없이 정국 불안과 국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올해 초 사우디 국왕이 교체되며 왕가 분란이 심화되고 국제 유가 하락이 이어지며 사우디가 정치 경제적으로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사우디 여성들은 “이번 선거는 역사의 이정표가 아니라 사우디가 여권 신장에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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