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에 피해자 이니셜 새기고… 범행 동영상 SNS에 올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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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생방송 기자 총격살해 사건… 인격장애로 쫓겨난 동료의 증오범죄
범행직후 ‘자살노트’ 방송사에 보내 “회사에서 지속적 인종차별” 주장
2007년 조승희 총기난사도 언급… 오바마, 총기규제 입법 다시 촉구



26일 오전 미국 버지니아 주 로어노크에서 발생한 생방송 기자 사살 사건은 인격 장애로 쫓겨난 전 흑인 동료가 치밀하게 계획한 증오범죄로 드러났다.

범인인 베스터 리 플래너건(41·사진)은 총격 직후 자신의 범행 장면을 찍은 동영상을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리고 사건 2시간 후에는 범행 동기를 적은 22쪽짜리 ‘자살 노트’를 ABC방송사에 보내는 등 엽기 행각을 벌였다. 그는 경찰 추격을 받자 고속도로 노변 차 안에서 총으로 자살 시도를 했고 병원으로 이송된 뒤 사망했다.

플래너건은 ‘자살 노트’에서 자신이 흑인이고 동성애자여서 회사에서 지속적인 인종차별을 당했다며 자신에 대해 폭발을 기다리는 ‘인간 화약통(human powder keg)’이라고 소개했다. 또 올해 6월 백인 우월주의자 딜런 루프의 흑인교회 총기 난사가 자신의 범행 동기라며 “(루프가) 인종전쟁을 원한다고 했으니 한번 해보자”고 호전적인 말까지 쏟아냈다. 플래너건은 이어 “조승희는 (1999년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 때)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가 죽인 사람의 2배가 넘는 수를 죽였다”며 2007년 32명의 생명을 앗아간 한인 학생 조승희의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까지 언급했다.

○ 백인 동네서 자란 흑인 외톨이

하지만 그의 범행은 특정 단체에 속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기보다 전 직장 동료들에게 테러를 가했다는 점에서 인종차별보다는 직장에서 쌓인 울화를 풀기 위한 범행이라는 분석이 더 힘을 얻는다.

그는 6월 찰스턴 흑인교회 총격 사건 이틀 뒤 범행에 사용할 총을 구입했으며 범행 후 자신의 2009년 포드 승용차로 현장을 빠져나와 렌터카로 도주한다는 치밀한 계획까지 세웠다. 범행 대상으로 고른 전 직장 동료 앨리슨 파커 기자(24)와 애덤 워드 카메라 기자(27)의 이름 이니셜을 총알에 새겨 넣기도 했다.

미국 언론들은 그가 1999년 기자로 입문해 여러 직장을 떠돌았다며 주위 평판으로 미뤄 볼 때 ‘인격 장애’ 상태였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범인은 백인 동네에서 피해의식 속에 자란 외톨이 흑인이었다. 아버지는 한때 샌프란시스코대의 교수를 지냈고 어머니는 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등 비교적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다.

캘리포니아 태생으로 샌프란시스코 주립대를 졸업한 범인은 사회에 처음 진출하면서부터 방송사 기자로서의 성공을 꿈꿨던 것으로 보인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지역방송인 WNCT-TV에서 기자와 앵커를 하고 WTWC-TV, WTOC-TV, KMID-TV 등 여러 지역방송에서 일했다. 그러나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2000년대 중반 마케팅 회사로 옮겼으며 거기서 8년가량 근무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그가 성격 장애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탤러해시 방송국 WTWC에서 해고됐을 때 동료들은 “사람들을 때릴 것처럼 위협했고 뉴스룸을 휘젓고 다니는 기괴한 행동을 했다”고 했다. 플래너건은 당시에도 회사가 자신에게 인종차별을 가했다고 고소를 했다.

이번에 범행을 저지른 WDBJ7에는 2012년 3월 ‘브라이스 윌리엄스’라는 가명으로 입사해 방송 기자로 일했지만 역시 동료들과의 불화로 이듬해 2월 해고됐다. 그는 ‘평등고용추진위원회’에 이의 신청을 하면서 동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이번에 사살한 두 기자를 언급하면서 자신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고 인사부에 허위 사실을 고자질했다고 주장했다.

WDBJ7 제프 마크스 본부장은 총격 사건 후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플래너건은 재능도 있고 경험도 많았지만 종종 엄청난 분노를 폭발시키는 등 같이 일하기 힘든 동료여서 2년 전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 충격에 빠진 미국

하루 종일 충격에 휩싸인 미국인들 가운데 버지니아 주 로어노크 주민들은 브리지워터플라자 앞 사건 현장에 꽃과 인형, 편지 등을 쌓아 놓으며 사망한 언론인들을 추모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가슴이 찢어진다”며 애도를 표했다. 강력한 총기 규제 입법을 추진해 온 그는 “이 나라에서 총기 관련 사건으로 숨진 사람이 테러로 숨진 사람보다 훨씬 많다”며 의회에 계류 중인 총기 규제 입법을 재차 촉구했다.

정치권도 한목소리로 애도를 표시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이날 트위터에 글을 올려 “가슴이 찢어지고 분노가 치민다”고 말했다. 2012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도 트위터에 “(내 아내) 앤과 함께 숨진 기자들의 가족과 동료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며 애도했다.

한편 이번 사건 직후 세계 최대 유통업체인 월마트는 AR-15(M-16 계열 소총의 민간형 모델) 등 반자동 소총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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