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처럼 버텨라” 구제금융 차별에 민심 요동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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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운명의 날’ 그리스 2차총선 D-2… 현장 르포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심장 신타그마 광장은 35도가 넘는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인류의 민주주의가 태동한 그리스 문명의 심장인 이곳은 첫 디폴트(채무불이행)의 위기를 맞았던 지난해 여름부터 올 초까지 시위와 농성으로 점철돼 왔다.

유럽의 운명을 좌우할 총선(17일)을 사흘 앞둔 14일 아테네의 ‘명동’ 에르무이 거리. 오후인데도 관광객과 시민이 별로 없었다. 얼마 전 폐업한 미국 청바지 가게 매장이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그리스 경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구둣가게, 어린이 의류매장 등은 적게는 20%, 많게는 50%까지 할인한다는 안내문을 붙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에 있는 의류점 직원은 “관광객만 띄엄띄엄 들어온다. 매상은 지난해보다도 더 나쁘다”고 말했다.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이번에는 어느 당을 찍을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광장 맞은편의 기념품 가게에서 일하는 청년 직원은 “아직 결정을 못 했다. 친구들도 결심을 못한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신타그마 광장에 설치된 우파 신민주당의 홍보부스에서 만난 당 관계자는 “부동층이 아직도 30%에 이른다”며 “우리가 1당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새 현상이 눈에 띄고 있다. 스스로 물건을 만들고 고쳐 쓰는 것을 안내하는 DIY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책도 인기 있다. 예금 인출 불능 사태에 대비해 독일 뮌헨 등에 몰래 은행 계좌를 만들어 놓고 돌아오는 사람도 늘고 고학력 젊은층들은 이민을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시내 지하철역에 붙어 있는 뮤지컬 포스터 ‘지옥의 묵시록’이 아테네의 침체된 분위기를 나타내는 듯하다”고 전했다.

2차 총선을 앞둔 그리스 유권자들은 그리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면서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만큼 총선 판세도 오리무중이다. 선거법에 따라 선거일 2주 전인 2일 발표된 마지막 여론조사는 신민주당이 22.7%, 시리자당이 22.0%로 박빙이었다.

유럽연합(EU)과 시장은 구제금융을 지지하는 우파 신민주당이 1당이 되고 옛 여당인 좌파 사회당과 합쳐 확실한 과반수(전체 의석 300석)로 친유로존 연정을 출범시키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구제금융 협정 파기를 외치는 급진 좌파연합 시리자당이 1당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높은 청년실업으로 20대와 30대의 지지는 60% 이상을 차지하며 방만한 공공부문에 메스를 대면서 일자리를 잃거나 연금이 삭감된 공공부문 근로자들도 시리자당의 주요 지지 세력이 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스페인이 재정긴축 등의 조건 없이 1000억 유로(약 164조 원)의 자금 지원을 받게 된 것이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EU와 국제통화기금(IMF)이 그리스에는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긴축정책들을 요구해 놓고 정작 대마불사(大馬不死) 작전으로 나온 스페인에는 엄청난 특혜를 베풀었다는 불만이 팽배해진 것이다. 지난달 26일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가 “그리스 국민은 항상 탈세를 하려 드는데 세금을 납부하고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고 말한 것도 총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아테네=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그리스 총선#유로존#구제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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