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이집트]무바라크 앞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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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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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비式 망명? 전두환式 권력이양?
軍지지 얻으면 中톈안먼처럼 강경 진압할 수도

이집트의 반정부 시위가 확산 일로를 걷고 있지만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권좌에서 한 치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하지만 시위 사태가 더욱 격화될 경우 그는 결국 운명을 건 선택을 해야 한다. 그가 택할 선택지에 따라 이집트는 역사적 선례 중 하나와 비슷한 길을 갈 가능성이 적지 않다.

○1979년 이란혁명 ― ‘망명’

1979년 이슬람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끈 이란혁명으로 무함마드 리자 팔레비 당시 이란 국왕은 망명길에 올랐다. 이집트에서도 시위가 계속 확대되고 군부와 미국마저 등을 돌린다면 무바라크 대통령은 망명길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이집트 시위는 이란혁명과는 달리 조직적인 주도세력이 없다. 종교적 색채도 아주 엷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주창하는 최대 반정부세력 ‘무슬림 형제단’이 시위에 동참했지만 주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반정부 세력의 구심점이 될 카리스마 있는 종교적 지도자도 없다. 미 정보분석업체 ‘스트래트포(STRATFOR)’는 “반(反)무바라크라는 점 말고는 시위대가 분열돼 있어 무바라크 정권을 뒤엎을 대중적 파괴력은 보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1987년 서울 ― ‘이양’

월스트리트저널은 31일 “가장 가능성 높은 결말은 정권이 레임덕에 빠지거나 이양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위기를 겨우 넘긴 무바라크 정권이 9월 예정된 대선까지 힘을 잃고 삐걱대거나, 자신이나 아들 가말 모두 차기 대권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다는 시나리오다.

이는 서울의 1987년 6월 항쟁을 연상시킨다. 대학생이 앞장서고 야당과 재야가 뒤를 받치며 넥타이부대로 대표되는 중산층까지 동참한 6월 항쟁은 젊은층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와 공통점이 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며 민주화 요구에 굴복했지만 집권과정 및 재임 당시의 죄과에 대한 보복이나 처벌은 받지 않는 형태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집트는 민주주의 요구뿐만 아니라 절대빈곤에서 비롯된 경제이슈가 주요 동기이며, 1987년 한국처럼 중산층이 두껍지 못하기 때문에 평화적 민주혁명을 이룰 사회적 토대가 취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1989년 톈안먼 ― ‘유혈 진압’

1989년 중국 톈안먼 사태를 베이징에서 취재했던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지난달 30일 자신의 트위터에 “(시위 중심지인)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이집트 시민은 흥분과 감격에 들떠 있다. 다만 유혈진압 직전의 중국 톈안먼 광장도 이런 분위기였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고 밝혔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유혈진압을 택하려면 군부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군부는 진압에 무게를 두는 듯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당 지도부에 절대 충성하는 중국 군부와 달리 이집트 군부는 연간 13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미국의 ‘눈치’도 봐야 한다. 그러나 스트래트포가 31일 이집트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군부와 경찰이 시위 진압작전을 조율하고 있다”고 전하는 등 군 지도부가 결국은 무바라크 체제 유지를 택할 것이라는 관측도 여전히 나오고 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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