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연수 리포트]‘우향우’ 프랑스… 인종차별 살아나고 톨레랑스 사라진다

  • Array
  • 입력 2010년 8월 18일 03시 00분


코멘트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는 교포 2세 김모 씨(34)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어머니, 언니와 함께 저녁을 먹은 뒤 파리 순환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도로 한가운데서 경찰차 2대가 포함된 차량 5대가 갑자기 앞뒤로 막아선 것. 사복경찰 4명이 권총을 겨누며 운전석에서 내리라고 하더니 다짜고짜 수갑을 채웠다. 영문을 모르던 김 씨가 경찰서로 가는 차 안에서 신분증과 자동차등록증을 보여주며 설명했더니 경찰은 그제야 이곳저곳에 연락을 해본 뒤 “번호판을 도용해 범죄를 저지른 다른 사람과 오해했다”며 풀어줬다. 김 씨는 “경찰이 사실 확인도 없이 여자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위협하며 수갑부터 채운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며 “이후 한 외국인 장애인 여성도 나처럼 범인으로 오해 받고 경찰에 연행될 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 씨가 경험한 경찰의 과잉대응과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인 행동은 프랑스가 최근 치안 강화를 내세우며 추진하고 있는 각종 정책과 무관치 않다.

○ 공권력 과잉 행사와 타민족 배타주의

빈민층이 몰려 사는 파리 동북쪽 라쿠르뇌브 시청 앞. 8월 들어 주말이면 경찰의 ‘과잉 진압과 폭력’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린다. 지난달 21일 경찰이 아프리카 불법 이민자를 단속하면서 임산부와 어린아이를 업은 여성을 강제로 도로 바닥에서 끌고 가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데 따른 것이다. 6일 집회에 참여한 한 프랑스인은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었다”며 “임산부나 노약자뿐 아니라 프랑스에 사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평등한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경찰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격앙했다.

8월 들어 프랑스 TV에는 경찰이 불법 집시촌을 철거하는 장면이 끊이지 않고 방영된다. 대다수 화면은 강제로 야영지를 해체하는 경찰과 짐을 싸서 길을 떠나는 불법 체류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프랑스 내무부는 7월 말부터 2주일 동안 불법 이민자들의 집단 야영지 40여 곳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내무부는 9월 의회에 제출할 이민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 언론에 따르면 경찰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일부다처제 같은 반(反)인권적 행위를 하는 이민자들로부터 국적을 빼앗는 조치가 포함될 것 같다. 이런 강경한 이민책은 지난달 17일 그르노블 교외에서 카지노를 강탈하고 도망가던 한 청년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뒤 벌어진 빈민계층의 소요 사태가 도화선이 됐다. 2005년 11월 파리 북부 교외지역에서 발발한 이민자 폭동 사태를 우려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불법 집시캠프 소개 및 추방+치안 위협 이민자의 국적 박탈’이라는 초강수로 나왔다.

7월 27일 파리 경찰청 운전면허국 사무소. 자국 면허증을 프랑스 면허증으로 교환하기 위해 오전 10시부터 5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 외국인 10여 명이 모여 서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한 40대 영국 여성은 “두 달 전 면허증 교환을 신청하러 왔을 때도 6시간이나 기다렸다. 외국인 신청자들은 수가 적다는 이유로 계속 뒤로 미루고 프랑스인 민원부터 처리하다 보니 우리만 피해를 본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아프리카 출신 주재원이라는 한 50대 남성은 “외국인에 대한 그런 많은 행위가 프랑스적인 업무의 특수성이라는 말로 포장돼 넘어간다”고 말했다.

12일 프랑스 언론이 시끄러워졌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프랑스의 치안 정책을 이틀간 논의한 뒤 “프랑스에서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증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한 위원은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에서 협력했던 비시정부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정치적 계산만으로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위험하게 부추기고 있다”고 정면 비판했다. 사회당 출신의 미셸 로카르 전 총리는 “나치 이래 볼 수 없었던 정책”이라고 지적했고, 우파의 거물인 알랭 쥐페 전 총리는 “치안 정책이 우리의 가치에 맞지 않는 극단으로 흐르면 안 된다”고 거들었다. 주간지 마리안은 사르코지 대통령을 “깡패(Voyou)”로 칭하기도 했다.

○ 반발하는 정부와 동조하는 국민

피에르 를루슈 유럽연합(EU)담당 장관은 유엔의 비판에 “2007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가입에 관한 EU 협약에 따라 이들 국가 출신자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해 7년 동안 제한이 가해질 수 있다”고 맞섰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출신 집시들의 추방 조치가 EU 회원 국민의 자유로운 이동권을 제약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대한 반박이었다.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의 프레데리크 르페브르 대변인은 12일 라디오에 나와 “구치소에 있는 사람 중 10%는 외국인”이라며 “외국인 문제가 심각하다”고 언급했다. 경찰은 올 들어 불법 이민에 관여된 조직 122개를 적발해 처리했다. 이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60%나 증가한 수치. 정부는 연말까지 최소 200개를 없앤다는 방침이다. 프랑스는 지난 한 해만 2만9000여 명의 불법 체류자를 추방했다.

치안 유지의 최일선에 있는 경찰은 EU 회원국 내 행정시스템 통합 조치들이 늘어나면서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고 토로한다. 14일 파리 15구에서 만난 한 경찰은 “인접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용의자들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프랑스로 와서 돌아다닌다”고 말했다. 한 예로 EU 회원국들은 자동차 번호판 양식의 통일을 추진하고 있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같은 양식의 번호판 차량이 너무 많아 단속에 어려움이 크다는 얘기다.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달 6일 발표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79%가 불법 집시촌의 해체와 추방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야당과 인권단체는 물론이고 일부 여당 인사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대다수가 정부의 치안 강화, 불법 이민 철퇴 정책에 찬성하는 것은 조금 곱씹어볼 대목이다. 일각에선 1995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 이래 15년 넘게 우파 대통령 체제가 이어지고, 우파가 유럽을 지배하는 시대적 흐름이 대두되면서 프랑스 국민에게도 자연스레 유럽 민족주의 성향이 나타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통계상으로는 불법 이민과 범죄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EU 국경통제기구 FRONTEX는 올 6월 초 낸 보고서에서 “지난 한 해 EU 회원국의 국경을 불법으로 넘으려다 적발된 시도가 10만6200건으로 2008년보다 33%나 줄었으며 계속 감소하는 추세”라고 밝혔다. 또 프랑스 범죄연구소의 2009년 범죄보고서에 따르면 시민들이 가장 피부로 느끼는 생활형 범죄인 ‘절도 및 기물 파괴 등을 통한 재산 침해’ 건수는 2004년 270만8934건에서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매년 감소해 지난해는 222만7649건으로 5년 동안 17.8%나 줄었다.

▼ 이민자 규제 강화하는 EU ▼

유럽연합(EU) 회원국 내 전체 불법 이민자는 700만∼800만 명으로 추산된다. EU 인구 5억 명 중 1.4∼1.6%다. 불법 이민 및 노동 문제는 서유럽 선진국들이 방치한 측면이 있다. 불법 이민자들이 값비싼 자국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유럽 역시 엄청난 구조조정과 실업에 직면하면서 이민 규제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영국은 5월 집권한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선거 과정에서 “EU 비회원국 출신 이민자 제한, 국경 경찰 병력 강화, 영국인과 결혼하려는 외국인 영어능력시험, 학생 이민 과정 강화 등의 법안 마련을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영국 정부는 관련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캐머런 정부는 일단 7월부터 내년 3월까지 EU 이외에서 유입되는 이민자를 최대 2만4100명으로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에 들어오는 이민자는 연간 15만 명으로 이 중 절반 이상이 EU권 밖에서 유입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2008년 총선에서 불법 이민자들을 ‘악의 군대’로 칭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이탈리아 정부는 집시들의 범죄를 막고 불법 이민을 근절하기 위해 인권단체의 반발을 무릅쓰고 지문날인 작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의 EU 가입 이후 이탈리아로 쏟아져 들어온 루마니아인 이주자가 34만여 명에 이르는데 이 중 약 16만 명이 집시이고 특히 8만 명이 불법 체류자인 것으로 추산된다. 2008년 이탈리아 의회는 불법 이민자들의 범죄가 심한 지역에는 최대 3000명의 군대까지 주둔시키고, 범죄를 저지른 불법 이민자에게는 같은 범죄를 저지른 이탈리아인보다 3분의 1이나 많은 형량을 선고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켰다. 또 불법 이민자들에게 빌려준 토지는 국가가 몰수하고, 불법 체류가 적발되면 최대 4년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스페인은 지리적으로 북부 아프리카와 가까워 가난에 지친 아프리카인이 끊임없이 불법 이민을 시도한다. 스페인은 2005∼2008년 불법 근로자 75만 명을 합법화하는 조치를 시행하는 등 프랑스 이탈리아보다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이민정책을 취해왔다. 그러나 실업률이 10%를 넘고 불법 이민자들의 합법화 정책에 대한 보수층의 반발이 커지자 EU의 이민협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이며 강력한 이민 규제 대열에 합류하는 추세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이 기사는 지난 1년간 SBS문화재단 후원으로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연수한 국제부 이종훈 기자가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이 기자는 지난달 25일부터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