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연수 리포트]“교외저택은 덫” 일터 곁 임대단지로…美 주거문화 ‘그레이트 리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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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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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거리 차량출퇴근 지쳤다” ‘마당 있는 큰 집’ 꿈 포기
주택 버블 붕괴도 영향

채플힐 등 대도시 주변엔 주상복합단지 공사 한창

메도몬트 빌리지를 세운 부동산개발업체 이스트웨스트파트너스가 노스캐롤라이나 주 채플힐 시에 건설 중인 주상복합단지.
메도몬트 빌리지를 세운 부동산개발업체 이스트웨스트파트너스가 노스캐롤라이나 주 채플힐 시에 건설 중인 주상복합단지.
6월 초 오후 2시경 뙤약볕이 내리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채플힐 시의 주상복합단지인 메도몬트 빌리지.

이곳에서 6km 정도 떨어진 소도시 카버러의 약국에서 근무를 마친 약사 카라 앤드루스 씨(35·여)는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와 간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임대 타운하우스의 문을 나선 지 4분 만에 라시키스 초등학교에 도착한 그는 활짝 웃으며 뛰어나오는 딸 올리비아 양(8)을 만나 그날 학교생활에 대해 정답게 얘기를 나눴다. 단지 중앙에 있는 상가로 향한 앤드루스 씨는 슈퍼마켓에서 야채와 과일을 사서 장바구니에 담고 집으로 향했다.

앤드루스 씨는 일터에서 40km 떨어진 교외 단독주택에서 출퇴근하다 지난해 12월 메도몬트의 주택을 빌려 이사했다. 결혼 초기에 돈이 모이면 교외에 있는 주택을 구입하기로 남편과 계획을 세웠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집값이 떨어지고 대출받기가 어려워지면서 임대주택 입주로 방향을 틀었다.

이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앤드루스 씨의 일상 속에는 금융위기 이후 급변하고 있는 미국인의 생활방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세계적 도시경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이런 변화를 미국인의 생활양식(라이프스타일)을 뿌리부터 바꾸는 전면적 재편, 즉 ‘그레이트 리셋(The Great Reset)’이라고 이름 지었다.

○ 차 없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메도몬트는 6년 전 처음으로 입주가 시작됐다. 주립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대(UNC)가 있는 채플힐 시의 중심가에서 3km 거리. 걷거나 자전거로 왕복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 듀크대가 있는 더럼 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주도인 롤리도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차로 15∼35분 만에 갈 수 있다. 세계적 연구개발단지인 리서치트라이앵글파크(RTP)도 10분 거리다.

5km² 넓이의 단지 중앙에는 슈퍼마켓 카페 빵집 옷가게 잡화점 등 50여 개의 상점이 몰려 있다. 상가 2, 3층은 사무공간으로 크고 작은 기업이 입주한 상태. 주변으로 아파트 타운하우스 단독주택 등 300여 채의 주택이 배치됐다. 초등학교 의료시설 노인복지시설 수영장 등도 단지 안에 설치돼 있다. ‘뉴 어버니즘’ 철학에 기초해 주민들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을 걸어 다니며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한 ‘워커블 타운’ 구조다.

앤드루스 씨는 “주변 비슷한 집보다 임차료가 10% 넘게 비싸지만 딸이 걸어서 등하교할 수 있고 직장이 가까운 데다 쇼핑도 쉽게 할 수 있어 매달 기름값만 수백 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며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메도몬트는 ‘미국은 신발은 없어도 자동차는 있어야 살 수 있는 곳’이란 통념과 크게 다른 구조를 갖췄다.

메도몬트를 설계한 건축가 게리 자일스 씨는 거주자들이 자동차 중심의 에너지 고(高)소비형 생활방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단지 건설의 주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그는 “화석연료가 고갈되고 기름값이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미국인들도 과거와 같은 생활방식을 더는 고집할 수 없다”며 “직장과 학교, 집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해 자동차 이용을 줄일 수 있는 고밀도 개발이 바로 그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 사라지는 교외주택의 꿈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하는 주택정책 개혁도 이런 변화에 속도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새 주택정책의 목표는 ‘집 사지 말고 빌려서 살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신용도가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장기 모기지 대출의 문턱을 높이면서 집을 임차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유리한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지향했던 ‘오너십 사회’와는 180도 다른 정책이다. 부시 행정부의 오너십 사회는 미국인들이 주택 같은 자산을 더 많이 보유하게 함으로써 책임 있는 사회 구성원의 비중을 높인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신용도가 낮은 저소득층이 주택을 살 때 금융회사가 돈을 마구 빌려주는 것을 사실상 용인함으로써 주택시장 거품(버블)과 뒤이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오바마 정부의 새 주택정책은 ‘2, 3대의 주차공간과 바비큐를 할 수 있는 마당, 개인생활에 방해를 받지 않는 교외의 주택 소유’로 굳어진 ‘아메리칸 드림’의 토대를 뒤흔들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기의 여파로 올해 2분기(4∼6월) 미국의 자가(自家)소유 가구의 비율은 이미 66.9%로 하락했다. 10여 년 전인 1999년 4분기(10∼12월) 수준으로 주택 소유자 비중이 떨어진 것이다.

○ 일자리 많은 대도시로 인력 집중

“팔리지 않는 교외주택 소유가 인재들이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찾아 이동하는 것을 막는 ‘경제적인 덫’이 됐다.” 플로리다 교수는 5월 초 출간한 ‘그레이트 리셋’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이런 점 때문에 금융위기 이후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는 창의적 인재들은 일자리가 많고 일자리와 관련된 정보도 활발하게 공유되는 도심에 살길 선호하며 이동성이 높은 임대주택을 선택한다고 분석했다.

채플힐, 더럼, 롤리 등 3개 도시가 인접한 지역은 미국 동남부에서 고급 일자리가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이다.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에도 미국 동북부의 뉴욕-뉴저지, 서부의 샌프란시스코-토론토(캐나다) 등과 함께 일자리를 찾는 인재가 몰려들면서 상대적으로 집값 하락폭이 작고 경기가 빠르게 회복되는 지역이다. 플로리다 교수는 이런 지역들을 중심으로 그레이트 리셋이 더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국 전체 부동산시장이 여전히 침체에 빠져 있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채플힐 주변에는 메도몬트와 비슷한 개념의 주상복합단지 개발이 계속되고 있다. 메도몬트를 건설한 이스트웨스트파트너스 관계자는 “이런 단지에 입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어 현재 채플힐을 중심으로 2, 3개의 주상복합단지를 추가로 건설하고 있다”고 말했다.

채플힐·카버러(노스캐롤라이나)=박중현 차장 sanjuck@donga.com

이 기사는 지난 1년간 KT문화재단의 후원으로 미국 듀크대에서 연수한 경제부 박중현 차장의 보고서입니다.

장기불황-대공황-금융위기 뒤 ‘새로운 삶’ 모색
: 그레이트 리셋 :
PC 등 전자제품이 오작동을 일으킬 때 처음부터 모든 기능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누르는 리셋 버튼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한 사회가 대공황 등의 큰 위기를 맞은 뒤 구성원의 사회, 경제적 생활방식(라이프스타일)이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재편되는 현상을 뜻한다.

리처드 플로리다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1870년대 미국에서 장기불황이 시작되면서 본격화된 농촌사회의 해체와 뒤이은 대도시 공장지대 중심의 도심화(Urbanism) 및 산업화를 1차 그레이트 리셋으로, 1929년 주식시장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대공황이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끝나고 이후 사상 초유의 장기호황을 맞으면서 발생한 교외화(Suburbanization)를 2차 그레이트 리셋으로 평가했다.

화이트칼라 중심의 미국 중산층은 2차 그레이트 리셋 기간 자동차 보급, 도로망 확충, 소득 급증에 힘입어 슬럼화한 도심에서 벗어나 쾌적한 교외 주택지역으로 빠져나갔다. 배기량이 큰 자동차, 냉난방 비용이 많이 드는 단독주택 등 에너지효율이 낮은 라이프스타일은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와 이후의 에너지 가격 상승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초까지 유지됐다.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3차 그레이트 리셋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시작됐다.

플로리다 교수는 이번 변화의 핵심을 ‘자동차, 자기 소유의 집, 교외생활 등에 덜 의존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인재가 경제적 기회가 많은 대도시 권역으로 몰리고 일자리에 따라 쉽게 거주지를 바꿀 수 있는 임대주택을 선호하며 에너지효율이 높은 대중교통을 더 많이 이용한다는 것.

1차 이후 미국의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됐고 2차 이후 미국인의 생산성과 소득 수준이 급증한 데서 알 수 있듯 그레이트 리셋은 ‘창조적 파괴’의 속성을 갖고 있다. 이번 리셋에 미국 사회와 정부가 현명하게 대처한다면 과거의 비효율적인 라이프스타일에서 벗어나 지식경제시대에 걸맞게 변모할 것이라는 게 플로리다 교수의 전망이다.

“근린형 도심에 자동차 필요없는 거리 만들자”

: 뉴어버니즘 (New Urbanism) :
무분별한 도시의 팽창, 난개발 등에 문제의식을 가진 미국 건축가들이 시작한 도시개발 운동으로 ‘신도심주의’로 번역된다. 1993년 10월 미국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 시에서 건축가, 도시계획 전문가, 부동산 개발업자 등 170여 명이 모여 도심 황폐화 문제를 논의한 뒤 뉴어버니즘협회를 출범시켰다.

뉴어버니즘협회의 강령인 뉴어버니즘헌장은 대도시를 확장하는 대신 슬럼화된 도심을 전략적으로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주거와 상업지구 등을 아우른 도시 시설이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 안에 건설돼야 한다는 근린주구(近隣住區)형 개발을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인종이나 소득계층에 따른 거주공간의 분리, 난개발로 인한 환경 문제 등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재 미국의 많은 소도시는 뉴어버니즘 철학에 따라 ‘워커블 타운’을 표방하며 슬럼화된 도심을 보행자 중심으로 재건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대도시 주변의 많은 주상복합단지도 이 정신에 따라 개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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