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U 제복이 존경받는 사회]<3부·下>시민들 사랑받는 경찰메모리얼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28일 03시 00분


英 전국경찰메모리얼 “보비들 희생 잊지말자”… 1600여명 ‘명예’ 아로새겨

16일 영국 런던 경찰메모리얼을 찾은 시민들. 검은 대리석 기념물 앞에서 한 여성이 아이들과 함께 그 안에 비치된 순직경찰관 명부를 보고 있다. 경찰메모리얼은 트래펄가광장, 화이트홀, 제임스파크공원 등으로 이어지는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시민들이 오다가다 쉽게 들를 수 있다. 런던=송평인 특파원
16일 영국 런던 경찰메모리얼을 찾은 시민들. 검은 대리석 기념물 앞에서 한 여성이 아이들과 함께 그 안에 비치된 순직경찰관 명부를 보고 있다. 경찰메모리얼은 트래펄가광장, 화이트홀, 제임스파크공원 등으로 이어지는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시민들이 오다가다 쉽게 들를 수 있다. 런던=송평인 특파원

《‘노먼 더디, 경감, 시티 오브 런던데리 경찰, 자신의 두 아이와 함께 교회에서 나오던 중 테러리스트의 총에 맞음, 1982년 3월 28일 45세로 사망.’ ‘대니얼 버클리, 순경, 노섬브리아 경찰, 강도를 뒤쫓다 창고 지붕 20m 아래로 떨어져 치명적 부상, 1982년 2월 14일 32세로 사망.’ 16일 영국 런던 중심가의 ‘전국경찰메모리얼(The National Police Memorial)’. 검은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메모리얼의 작은 거울 칸막이 속 책자에 순직 경찰관 중 1982년 사망자의 명단이 밖에서 볼 수 있도록 펼쳐져 있었다.》
영화감독 위너씨 주도로 2005년 런던 중심가에 세워
시민들 둘러보며 애도

퇴직 경관이 명부작성 도와… ‘21년간의 작업’ 여왕에 헌정

이날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메모리얼에 들른 신시아 웬트워스 씨는 “자신의 두 아이가 보는 앞에서 테러리스트의 총에 맞아 쓰러진 아빠 경관이나 기필코 강도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지붕까지 쫓아 올라갔다 실족한 경관의 모습은 안타까울 뿐”이라며 “짤막한 사망경위가 적혀 있을 뿐이지만 읽고 있으면 하나같이 극적인 장면이 떠오르는 죽음들”이라고 말했다.

영국 의회 건물이 위치한 웨스트민스터에서 관청가인 화이트홀을 지나 여왕이 사는 버킹엄궁으로 향하는 ‘더 몰(The Mall)’ 입구까지에는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를 추모하는 세너타프(Cenotaph), 세계대전 여성기념비 등 여러 개의 메모리얼이 자리 잡고 있다. 그중 ‘더 몰’과 제임스파크공원이 만나는 곳에 2005년 ‘전국경찰메모리얼’이 세워졌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졌고 전쟁과 관련한 다른 메모리얼과는 달리 경찰을 위해 만들어졌다.

경찰메모리얼이 런던 중심가에 세워지기까지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영화감독 마이클 위너 씨(75)는 1984년 리비아대사관 인근에서 이본 플레처라는 경찰이 무자비하게 살해당한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매일 위험하게 생활하는 경찰에게 그들의 용기를 기념할 메모리얼 하나 없다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인은 그래도 끝이 있는 전쟁을 치르지만 경찰은 시작도 끝도 없는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후 ‘경찰메모리얼재단’을 설립하고 근무 중 경찰이 사망한 곳에 메모리얼을 세우기 시작해 지금까지 29개를 세웠다.

그러나 위너 씨는 “일반인이 잘 알지 못하고 찾기도 힘든 사망 현장에 메모리얼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도 볼 수 있도록 런던 중심가에 순직한 모든 영국 경찰을 위한 추모비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200만 파운드의 건립비용 중 그 자신이 50만 파운드를 댔다.

순전히 기부에 의존하는 건립비용 마련도 쉽지 않았지만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얻은 건립 터에도 문제가 많았다. 건립 터에는 이미 런던 지하철에 속한 거대한 통풍구가 설치돼 있었는데 그것을 없애버릴 수는 없었다. 설계는 이 통풍구를 그대로 둔다는 조건으로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 경에게 의뢰했다. 포스터 경은 말도 안 되는 조건에서도 위너 씨의 대의를 높이 평가해 기꺼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포스터 경은 메모리얼을 두 구역으로 나눴다. 한쪽은 통풍구를 검은 대리석으로 단순하게 봉해놓은 엄숙한 형태를 띠도록 설계했지만 다른 한쪽에는 은은한 초록빛이 도는 유리벽을 물 위에 세워 밝고 힘찬 느낌을 표현했다. 그는 죽음과 그것이 가져다준 평화를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눠 표현했다.

이곳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은 이곳에 전국경찰메모리얼이 있는 줄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 이들은 대개 눈에 띄는 유리벽에 끌려 접근하고 이후 자연스럽게 검은 대리석 메모리얼에 다가가 순직한 경찰의 이름과 사연을 읽게 된다. 한 젊은 커플은 “트래펄가 광장에서 제임스파크공원으로 가다가 우연히 이 메모리얼을 봤다”며 “잊고 지냈던 보비들(Bobbies·영국 경찰의 애칭)의 희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위너 씨의 노력은 또 한 사람의 조력이 없었다면 실현되기 어려웠다. 그는 바로 런던과 랭커스터 경찰로 일하다 2004년 퇴직한 앤서니 래 씨다. 래 씨는 메모리얼에 들어갈 순직경찰관의 완벽한 명단을 작성했다. 위너 씨가 하드웨어를 맡았다면 래 씨는 소프트웨어를 맡은 것이다.

래 씨는 “1983년 추운 겨울 바다에서 해난사고 구조에 나섰다가 동료 3명이 죽었으나 훈장조차 받지 못한 일을 잊지 못한다”며 “이때 이들과 비슷하게 죽은 경찰관의 이름이 일반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 내무부와 경찰의 기록을 뒤졌으나 그 기록이 매우 부실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후 300여 년에 걸친 영국의 근대 경찰사를 다 뒤져 순직 경찰관의 이름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 일간 더타임스의 모든 기사를 뒤졌다. 그 첫 결실로 1829년 런던경찰 설립 이래 근무와 관련해 죽은 500여 명의 이름을 모은 명예의 명부를 2001년 작성했다.

이 명부는 현재 런던경찰 본부 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그는 이 작업을 다시 전 영국 경찰을 상대로 확대해 2005년 그 결과를 전국경찰메모리얼에 바쳤다. 그의 21년간 작업의 결실인 이 명부에는 1680년 사망한 한 무명 경관부터 시작해 근무와 관련해 사망한 전 영국의 경찰관 약 1600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당연히 명부는 여왕에게 헌정됐고 여왕은 개막식에 참석했다.

래 씨는 순직자를 기억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물었을 때 “우리가 몇 푼 기부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순직한 경찰은 몇억의 돈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라며 “그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남은 가족을 돕겠다는 의지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런던=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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