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길’ 시작만으로도 성공
다양한 양자-지역협정 더하고, 美-中-EU ‘G3’ 전위에 나서야
《세계적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경이 동아일보에 특별기고문을 보내왔다. 그는 덴마크 코펜하겐 이후 유엔 차원의 기후회의와 병행해 주요 2개국(G2), 주요 20개국(G20) 회의를 통한 협상을 제안했다. 그는 지난해 환경 문제를 다룬 ‘기후변화의 정치학’을 펴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말싸움으로 변질되긴 했지만 덴마크 코펜하겐 기후회의는 지난해를 장식한 중요 사건 중 하나다. 본래 이 회의는 ‘모든 참가국이 서명하는 협정(global deal)’을 목표로 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코펜하겐 합의-몇몇 국가가 만든 원칙과 다짐의 짧은 성명-는 그 협상에서 나온 유일한 가시적 결과다.
논평가 몇몇은 ‘희망한 목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을 찾아야 하고 최대한 되는 쪽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대부분은 그 결과가 대실패라고 봤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세계는 어쩌면 그동안 끊임없이 얘기만 해오다가 이번에 실제 기후변화 대응에 나서기 시작하는 가장 바람직한 길에 들어선 것인지 모른다. 이 길은 반드시 모든 국가의 동의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유엔은 뒤로 밀려났다. 그렇다고 해서 전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정학적 현실을 인정하고 이와 싸우기보다는 함께 가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코펜하겐 합의를 체결하기 위해 만난 국가는 미국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남아공을 뺀 나머지 국가를 보라.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개발도상국 3곳과 선진국 1곳이다.
기후변화에 맞서 지구 평균온도의 상승을 섭씨 2도 이내로 묶는 데 성공하려면 국제관계에서부터 혁신을 이뤄야 한다. 코펜하겐 합의는 단지 시작일 뿐이지만 그 위에서 다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토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합의에 확고한 형식만 조속히 갖춰진다면 현재의 고착 상황, 즉 각 나라는 다른 나라가 나서기만 기다리는 상황을 타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모든 것은 선진국이 코펜하겐 협정에 따라 1월 31일까지 제시할 이산화탄소 감축 계획이 얼마나 확고하고 실제적이냐에 달려 있다. 선진국의 제안은 그럴듯하고 믿을 만해야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 선진국은 말만 했지 실제로 한 게 별로 없다. 협정을 받아들이기 원하는 개도국도 같은 날 감축 계획을 내야 한다. 사상 처음으로 이들에게 약속을 강제할 제도가 마련될 것이다. 선진국에서 돈을 지원받는 개도국은 그 제안대로 실천하는지 국제적인 감시를 받게 된다.
중단기적으로 어떤 틀이 짜여질 것인가. 이 틀은 크고 부유한 국가들이 자발적인 전진을 하는 동안 작고 가난한 나라들은 고통을 겪는 상황을 초래할 것인가? 나는 적어도 협정의 전체 구조가 옳고, 작고 가난한 나라들이 자신의 특정 관심사를 표명하기 위한 조직을 갖춘다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계무역기구(WTO)처럼 두 개의 트랙을 나란히 유지할 필요가 있다. WTO가 전 세계적 무역협정의 틀을 정하는 데 실패했을 때 다양한 새로운 조직이 생겨났다. 이 다양한 그룹과 지역은 약점도 되지만 강점이 되기도 한다. 같은 것이 기후변화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우리는 코펜하겐 협정에 양자 간 혹은 지역 간 협정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자진해서 하겠다는 의지를 합쳐야 한다. 미국과 중국은 보다 일반적인 협정에 가입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양자 협정을 계속해야 한다. 코펜하겐에서 190개국이 구속력 있는 협정을 체결하고 미국과 중국 2개국만 동의하지 않았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 합의는 큰 의미가 없다. 두 나라가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40%에 이르기 때문이다. 차라리 두 나라에서 시작해 이들의 진지하고 책임 있는 협력을 확실히 하는 편이 한층 효과적이다.
G2 외에 G3가 있어야 한다. 유럽연합(EU)은 코펜하겐에서 뒤로 밀려났다.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해묵은 약점의 결과다. 그러나 인구가 5억5000만 명인 EU는 중심, 더 바라자면 전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또 협정의 기안자들은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세워진 분리선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20개 오염대국(이에는 몇몇 개도국도 포함돼 있다)이 산업화 이후 전체 배출량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역시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국가가 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 접근에는 분명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대안은 없다. 그렇다고 다자협상을 그만두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양한 형태의 협력을 시작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앤서니 기든스 경(72)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 사회학자. 1987년 케임브리지대 교수, 1997년 런던정경대(LSE) 학장 등을 역임했으며 2003년 이후 LSE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초기에는 사회학 이론 연구에 집중했으나 1990년대 이후 모더니즘이 사회 및 개인에 미친 구체적 결과를 탐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1998년 그가 좌우의 정치대립을 넘어 제시한 ‘제3의 길’은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정치적 가이드가 됐다. 2004년 영국 노동당 소속의 1대 종신 상원의원이 됐다. 주요 저서로 ‘사회학’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 ‘모더니즘과 자아정체성’ ‘기후변화의 정치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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