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범, 속옷에 폭탄 숨겨 탑승… 착륙직전 폭파 시도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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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용의자 기내 범행 순간, 담요로 덮어 숨긴채 폭발 작업
화염-연기에 기내 아수라장… “뇌관 역할 액체 적어 안터진듯”

구멍난 보안… 검색강화 후폭풍
용의자, 테러의심자 명단 올라…탑승금지 대상 빠져 검색 통과
가족들 “美대사관에 사전 통보”


성탄절 아침에 들려온 항공기 폭파테러 기도 소식에 미국 국민은 경악했다. CNN과 폭스뉴스 등 미국의 뉴스전문 채널은 성탄절부터 이튿날까지 온통 ‘테러 뉴스’만을 쏟아냈다.

○ ‘꽝’ 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 속에 화염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샴페인병이 열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유리창이 깨졌거나 비행기 동체에 뭐가 부딪힌 줄 알았다.” 테러용의자 좌석에서 6열 앞인 13열에 앉아 있었던 비나 사이갈 씨는 화공약품 냄새를 맡고 뒤를 돌아보자 화염이 솟아올랐다고 전했다. 비행기 안은 순식간에 승객들의 비명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사업차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뒤 귀국하던 칼스 키프먼 씨는 “당혹감이 공포와 절망으로 바뀐 것은 한순간이었다”며 “승무원들의 눈에서도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용의자는 폭발 시도 전에 20분 동안 화장실에 가 있었고, 다시 자리에 돌아와서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속이 안 좋다”고 얘기한 뒤 배와 무릎을 담요로 덮었고 그 순간 연기와 함께 ‘퍽’ 하는 소리가 시작됐다고 외신은 전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용의자는 고성능 폭발물질 PETN을 속옷에 꿰매 탑승한 것으로 드러났다. PETN은 TNT의 1.66배의 폭발력을 가진 고성능 폭발물질. 뉴욕포스트는 “용의자는 속옷 안 사타구니 근처에 PETN 분말을 채운 콘돔을 꿰맨 것으로 나타났다”며 “PETN에 주사기로 화학물질을 주입해 폭발시키려 했다”고 전했다. 불발 원인에 대해 ABC방송은 “뇌관 역할을 하는 액체가 미처 분말에 주입되지 못했거나 주입된 액체가 너무 적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전했다.

○ 구멍 난 보안체계

이번 폭탄테러 시도는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 방지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정작 보안체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용의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히폴 공항에서 탑승할 때 보안검색에서 걸리지 않았다. 미국의 국가대테러센터가 의심스러운 인물 데이터베이스(55만 명)에는 올라 있었지만 탑승 금지 대상자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더욱이 범인의 아버지 알하지 우마루 무탈라브 씨는 이미 6개월 전에 나이지리아 정부와 미 대사관에 아들의 극단적인 행동을 신고했지만 당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피터 호에크스트라 하원 의원(공화·미시간 주)은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 정부는 그가 알 카에다 조직과 연계돼 있다는 것을 최소한 2, 3개월 내에 알았다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미 ABC방송은 용의자가 인터넷을 통해 예멘의 한 과격 지도자와 접촉했다고 미 당국에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 검색 강화 후폭풍

사건 직후 항공기보안 검색이 대폭 강화됐다. 미국으로 들어오는 국제선 항공기 승객들은 착륙 1시간 전부터는 기내에서 움직이지 말고 좌석에 앉아 있도록 하고 어떤 개인소지품도 무릎 위에 놓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또 국제선 승객들은 기내에 반입할 수 있는 가방을 1개씩만 허용하며 미국 국내선 항공 승객들도 강화된 보안검색을 받게 된다고 항공사들은 발표했다.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을 비롯해 유럽 각국 공항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파리 샤를드골 국제공항에서는 여성 핸드백만 기내 반입이 허용됐을 뿐 모든 짐을 수하물로 부치도록 했다. 영국 런던 히스로 국제공항에서도 미국행 여객기 탑승객을 대상으로 이중의 보안검색과 기내 반입품 제한 등 종전보다 훨씬 강화된 보안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 현지 반응

ABC, NBC 등 공중파 방송과 CNN, 폭스뉴스 등은 테러전문가들을 출연시켜 용의자가 알 카에다와의 연루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전하면서 “미국이 아직도 테러의 위협에 노출돼 있으며 비행기 등 대중교통수단이 주요 타깃”이라고 보도했다. CNN은 용의자가 착륙 직전까지 비행기 폭발 시도를 하지 않은 이유, 공모자는 없는지 등 주요 의문점을 분석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도 1면 머리기사로 테러 미수사건을 다뤘다. 뉴욕타임스는 테러용의자가 알 카에다와 연루된 예멘의 폭탄전문가와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번번이 테러의 위험에 노출되면서도 보안에 구멍이 뚫리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다뤘다. 타임지는 ‘증오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기사에서 “9·11테러 이후 공항보안 검색을 피하기 위한 기발한 수법들이 나오고 있다”며 “자살을 각오하고 속옷 안에 교묘히 폭발물을 숨기는 등의 방식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나이지리아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
이슬람교 전파 앞장서 ‘알파’ 별명▼
■ 범인은 23세 런던 유학생


미 여객기 폭파미수범 우마르 파루크 압둘무탈라브는 올해 23세로 영국 런던에서 유학한 열성적인 이슬람 신자로 밝혀졌다.

압둘무탈라브는 나이지리아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하지 우마루 무탈라브 씨는 나이지리아 퍼스트뱅크 은행장을 최근까지 지냈고 1970년대에는 나이지리아 정부에서 장관급 관료로 일했다. 이런 아버지를 둔 덕분에 압둘무탈라브는 지난해까지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런던(UCL)에서 3년간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그 전에는 아프리카 토고의 수도 로메의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스쿨(BIS)에서 고교과정을 수학했다.

압둘무탈라브는 고교 재학 당시부터 동급생에게 열성적으로 이슬람교를 전도했으며, 그 때문에 이슬람 학자를 뜻하는 신조어인 ‘알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런던을 떠난 이후 아버지와의 접촉을 끊고 이집트와 두바이에서 거주해 왔다. 아버지는 아들이 극단적 종교 성향을 지닌 것을 우려해 6개월 전 아부자 주재 미국대사관과 나이지리아 보안기관에 그의 활동내용을 신고했다. DPA통신에 따르면 현재 나이지리아 당국의 수사에 협조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신고를 했는데도 아들이 어떻게 미국까지 갈 수 있었는지 의아해한 것으로 전해졌다.

압둘무탈라브는 런던에 거주할 당시 UCL에서 멀지 않은 고급 주택가인 메릴번 구역의 한 아파트에 살았다. 그와 UCL를 같이 다닌 파브리치오 카발로 마린콜라 씨(22)는 영국 인디펜던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매우 종교적이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극단적인 행동을 보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압둘무탈라브는 5월 대학에서 6개월짜리 코스를 더 밟겠다는 이유로 영국 정부에 비자 신청을 했으나 거부됐다. 선데이타임스는 영국 출입국 당국이 그가 공부를 하겠다는 대학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해 그의 비자 신청을 거부했다고 전했다.

그는 16일 가나 수도 아크라의 KLM항공 사무소에서 현금 2831달러를 주고 항공권을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여행 경로는 당초 24일 밤 나이지리아의 라고스→네덜란드 암스테르담→미국 디트로이트에 도착한 뒤 다시 암스테르담을 거쳐 아크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지난 2년간 이슬람 테러조직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미국의 감시리스트에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런던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복수 비자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그는 영국 첩보기관 MI5의 감시망에도 걸려들었으나 지속적인 감시를 할 만큼 위협적이지는 않다는 판단을 받았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영화속 영웅’처럼 참사 막은 영화감독

■ 범인 제압한 승객은

‘크리스마스 재앙’을 막은 야스퍼르 스휘링아 씨(32·사진)는 네덜란드 영화감독. 플로리다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비행기를 탄 스휘링아 씨는 “갑자기 ‘뻥’ 하는 소리를 들었고 30초쯤 지나자 연기가 났다”며 “일부가 비명을 질렀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연기가 나는 쪽으로 점프를 했다”고 숨 가쁜 상황을 전했다. 범인 좌석(19A)에서 오른쪽 반대편인 20J에 앉아 있었던 그는 승객 4명의 머리 위를 다이빙하듯 훌쩍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용의자의 무릎 담요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본 그는 재빨리 용의자의 몸을 뒤져 다리에 붙어 있던 폭발물을 제거했다. 그는 곧 “물을 달라”고 외쳤고 승무원들이 소화기를 갖고 달려와 불을 껐다. 스휘링아 씨는 범인의 목을 조른 상태로 1등석으로 데려 갔다. 용의자와 격투하다 오른손에 화상을 입은 그는 “내가 영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무엇인가 해야 할 상황이었고 너무 늦지 않았음에 행복하다”고 말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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