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용기있는 고백으로…美 아동성폭행범 19년만에 검거

  • 입력 2009년 10월 15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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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슈엣 씨(오른쪽)가 13일 남자친구의 위로를 받으며 19년 전 자신을 성폭행한 범인이 검거된 것에 대한 소감 발표를 준비하며 울먹이고 있다. 디킨슨=AP 연합뉴스
제니퍼 슈엣 씨(오른쪽)가 13일 남자친구의 위로를 받으며 19년 전 자신을 성폭행한 범인이 검거된 것에 대한 소감 발표를 준비하며 울먹이고 있다. 디킨슨=AP 연합뉴스
“세상은 모두 잊었지만 난 잊지 않았다”

피해여성 신원 스스로 공개… “나는 피해자 아닌 승자”
DNA 분석기술 발달로 당시 증거들 재수사끝 범인 체포

1990년 8월 10일 새벽 미국 텍사스 주 디킨슨 시의 한 아파트. 여덟 살 소녀가 혼자 자고 있는 방에 낯선 남성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놀라 겁을 내는 소녀에게 그는 “나는 네 가족을 잘 아는 비밀경찰”이라고 안심시켰다. 그는 경찰이 아니라 소녀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 악마였다.

남자는 소녀를 차에 태워 숲으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 살인까지 하려고 칼로 목을 길게 그었다. 실신했다 깨어난 소녀는 옷이 모두 벗겨져 있고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움을 요청하려고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후두가 손상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건 발생 약 14시간 뒤에야 숲으로 놀러온 아이들이 발견해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병원을 찾아온 수사관에게 소녀는 “범인은 자신을 ‘데니스’라고 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내 목을 4차례 졸랐다”고 노트에 써서 보여줬다. 당시 의사들은 소녀에게 “영원히 말을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강한 의지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말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19년이 흘렀다. 어른으로 성장한 제니퍼 슈엣 씨(27)에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그러나 잊는 대신 이름과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고 범인을 잡기로 했다. 지난해부터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제니퍼를 위한 정의(Justice for Jennifer)’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범인의 몽타주를 올리는 등 사건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범인을 잡아줄 것을 호소하기에 이른 것.

그는 지난달 CNN과의 인터뷰에서 “나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소녀들에 관한 일이다. 내가 사건을 잊어버리려고 했다면 수사가 지금까지 계속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투사(fighter)’라고 불렀다.

경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현지 경찰은 지난해 7월 미 연방수사국(FBI)에 사건 당시 현장에서 수거한 범인의 속옷과 셔츠 등 증거물 재분석을 의뢰했다. 당시에는 유전자(DNA) 분석 기술이 떨어져 범인의 신원을 밝혀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첨단 장비로 분석한 결과 데니스 얼 브래드퍼드(40)라는 남성의 DNA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브래드퍼드는 1996년 아칸소 주에서 35세의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검거돼 4년간 복역했기 때문에 DNA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 이후 경찰의 추적이 시작됐고 13일 마침내 체포됐다. 두 자녀를 둔 그는 아칸소 주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평범한 가장으로 살고 있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범인 검거 직후 슈엣 씨는 그동안 자신을 옆에서 지켜준 남자친구 조너선 마르티네즈 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취재진 앞에서 소감을 밝혔다. 두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지만 그는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승자(勝者)”라며 “그날의 사건은 끔찍했지만 19년이 지난 지금 ‘나는 괜찮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이 자리에 섰다”고 당당히 말했다. 이어 “내 사건이 모든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의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마라’는 점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FBI의 리처드 레니슨 특별수사관은 “10년 동안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수사를 담당해왔지만 슈엣 씨만큼 큰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고도 살아난 피해자를 본 것은 처음”이라며 “(19년이나 된 미제사건을) 재수사하게 된 것도 그가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그의 강한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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