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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8월 1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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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가스 가격의 상승은 산유국의 독재정치 유지에 도움이 되곤 했다. 자원이 무기화되면서 서구 국가들은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산유국의 독재정치를 눈감아 왔다.
그러나 이런 자원과 독재정치 간의 악순환 구조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벨기에 싱크탱크인 유럽정책연구센터(CEPS)는 최근 보고서에서 고유가로 인한 분배 투명성 문제가 산유국 내부의 개혁을 이끌고 있으며, 서구 사회도 이젠 안정적인 석유 확보를 위해 산유국에 정치적 정통성을 요구하게 됐다고 밝혔다.
○ 유가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함수관계
석유와 민주주의는 쉽게 섞이기 어려운 성질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산유국은 취약한 국가 구조, 과도한 중앙집권 및 군사비 지출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를 설명하는 ‘석유 정치학’의 제1법칙은 “부유한 산유국에서 유가와 민주주의는 항상 반비례한다”는 것이었다.
저유가 시절인 1998년 나이지리아와 인도네시아가 급속한 민주화를 이뤄냈고, 모로코와 요르단처럼 석유 자원이 빈약한 국가들이 선진화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것을 지켜본 학자들은 이를 정설처럼 받아들이곤 했다.
그러나 CEPS 보고서는 국내 정치와 국제사회의 영향력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유가 상승이 민주화에 도움을 주는 사례에 주목했다.
이란 베네수엘라 나이지리아 알제리 등 독재적 포퓰리즘 국가들은 2002년 이후 고유가로 불어난 수익을 국민에게 배분했다. 그러나 이런 일회성 배분은 빈부격차를 확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중산층이 분배 투명성은 물론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국민들의 거센 요구가 민주화의 진전으로 이어진 셈이다. 얼마 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자신의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 투표에서 실패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가 판매 수익이 고스란히 왕족의 금고로 들어갔던 사우디아라비아 정권은 대대적인 국민의 비판에 직면해 제한적이나마 개혁을 시작했다. 이 시기가 유가 상승과 궤를 같이한다. 쿠웨이트에선 의회가 앞장서서 국가 자산에 대한 투명한 정보 제공을 이끌어냈다.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독재정권을 눈감아 주던 서구 사회가 이런 정권의 예측 불가능한 정책과 취약한 기술력 탓에 안정적인 석유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젠 외국 투자자들이 산유국에 정치적 정통성 확보를 지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산유국 독재정권의 황금시대를 열어줄 것만 같았던 고유가가 이젠 정치적 자유화를 요구하는 압박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 아직은 갈 길이 먼 산유국의 민주화
고유가가 민주화로 연결되는 새로운 경향에도 불구하고 아직 상당수 국가는 ‘자원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풍부한 천연자원이 독재자들의 주머니만 불리면서 빚어진 현상이다. 부패가 만연하다 보니 인적자원이나 시설 투자에 들어갈 돈이 부족해지고 결국 경제 전반에 걸친 경쟁력 저하로 이어져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민주화까지 늦어지고 있다.
CEPS 보고서는 아울러 최근의 고유가와 공급 부족 현상이 석유 독재정치의 검은 역류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나이지리아와 알제리의 민주화 개혁은 좌절됐고 아제르바이잔과 카자흐스탄, 앙골라의 정권 개혁 약속은 물거품이 됐다. 앙골라의 에두아르두 두스산토스 정권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자유화 패키지안은 물론이고 선거 약속도 거부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