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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5월 17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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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직원에서 도쿄대 교수로, 다시 구마모토(熊本) 현 지사로.’
가바시마 이쿠오(蒲島郁夫·61) 씨의 특이한 이력이다.
고교시절 그의 성적은 전교 230명 중 200등 안팎.
농업연수생으로서 미국에 건너가 네브래스카대에서 돼지의 정자(번식생리학) 연구로 석사를 마친 뒤 돌연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따냈다.
일본에 귀국한 뒤에는 쓰쿠바(筑波)대 교수를 거쳐 도쿄(東京)대 교수로 취임했다.
3월 23일 치러진 고향 구마모토 지사 선거에 출마해 “역경 속에서 꿈을 갖자”고 역설해 압도적인 표차로 경쟁자들을 누르고 당선됐다.
15일 도쿄 지요다(千代田) 구 ‘도도후켄(都道府縣) 회관’에서 그를 만났다.
―도쿄대 교수였던 분의 고교시절 성적이 그렇게 처참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공부가 싫었습니다. 학교에도 제대로 가지 않았죠. 그래도 ‘목장주, 작가, 정치인 중 하나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고,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가계를 돕기 위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11년간 신문배달을 하면서 틈틈이 읽은 기사를 통해서도 세상공부를 했지요. 네브래스카대에 들어갈 때도 처음에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도교수가 심사위원들을 설득해 저를 받아들이게 해줬습니다. ‘당시의 패자’가 이렇게 부활했습니다.”
―또래보다 6년 늦게 대학에 들어가 농학석사까지 하고서 전공을 정치경제학으로 바꿔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 들어갔습니다. 이 같은 ‘전환’도 느닷없다는 느낌입니다만….
“정치는 저의 세 가지 꿈 중 하나였어요. 석사과정을 끝낼 즈음 난생 처음으로 ‘평생 공부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한다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당시 미국 사회의 유연성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같으면 농학 석사가 정치학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미국은 이색적인 인물을 포용할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미 결혼해서 자녀를 둘이나 둔 그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마련하며 보통 6년이 걸린다는 박사학위를 3년 9개월 만에 따냈다.
“장학금이 4년으로 끝나게 돼 있었거든요. ‘배수의 진’으로 온 가족의 귀국 비행기표를 미리 사놓고 공부했습니다.”
―안정된 교수 자리를 박차고 구마모토 현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경에 빠진 고향에 꿈을 되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구마모토 현은 1조 2000억엔의 부채를 안고 있습니다. 회사라면 이미 파산 상태지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재생의 가능성도 있는 겁니다. 미나마타병 피해자 구제문제 등 40∼50년간 묵은 난제도 있습니다만, 임기 4년간 적어도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는 취임 뒤 가장 먼저 자신의 월급 124만 엔에서 100만 엔을 삭감하는 조례안을 현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제가 조금 손해를 보는 대신 직원들의 의식개혁과 구마모토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 등 돈으로 치면 수십억 원의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남는 장사 아닙니까.”
―패자 부활이 가능한 사회를 강조하셨습니다. 한국도 엘리트주의 경쟁이 치열해 좌절하는 젊은이들을 낳고 있는데….
“젊은 시절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다시는 궤도에 돌아올 수 없는 시스템으로는 사회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지금 좌절하고 있는 젊은이가 있다면 저를 보고 꿈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는 2001년 동아일보 ‘세계의 눈’ 필자로 1년간 칼럼을 기고했다. 그는 “2007년에만 한국인 관광객 30만여 명이 구마모토를 찾았더라”며 감사의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