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연행 공문서 없다더니…“도쿄재판 조서 7건 증거”

  • 입력 2007년 4월 2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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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히로후미 간토가쿠인대 교수가 일본군위안부 강제 동원을 뒷받침하는 공적 문서가 없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말이 잘못됐음을 보여 주는 도쿄재판 기록을 들어보이고 있다. 그는 강제 동원 입증 자료는 도쿄재판 기록 외에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공문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요코하마=서영아 특파원
하야시 히로후미 간토가쿠인대 교수가 일본군위안부 강제 동원을 뒷받침하는 공적 문서가 없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말이 잘못됐음을 보여 주는 도쿄재판 기록을 들어보이고 있다. 그는 강제 동원 입증 자료는 도쿄재판 기록 외에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공문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요코하마=서영아 특파원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 군위안부 강제 동원에 일본군 관헌이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을 입증하는 극동국제군사재판(통칭 도쿄재판)의 심문조서 7건을 최근 본보가 전문 입수했다. 하야시 히로후미(林博史·52) 간토가쿠인(關東學院)대 교수가 최근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찾아낸 이 자료들은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중국 등지에서 강제적으로 위안부를 동원하고 군위안소를 운영한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7건 중 5건은 네덜란드 정부, 1건은 프랑스, 1건은 중국 정부가 제출했다.》

이들 자료는 3월 초순 이래 “군 관헌이 집으로 들어가 강제로 끌어가는 것 같은 ‘협의의’ 강제성은 없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견해가 사실이 아님을 보여 주는 ‘공적 문서’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베 총리가 군위안부 연행과정의 군 관헌의 강제성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찾아봐도 이를 입증하는 공적인 문서가 없다’는 것. 그러나 도쿄재판의 증거자료로 제출됐던 사례들은 그의 주장에 반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한 사례로 인도네시아 모아 섬 지휘관이던 오하라 세이다이 일본 육군 중위가 연합국 네덜란드 군의 조사를 받는 가운데 ‘현지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했다’고 공술하는 장면(1946년 1월)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이어진다.

문: 어느 증인은 당신이 여자들을 성폭행하고 그들을 병영에 끌고 가 일본인들에게 제공했다고 말했다. 정말인가.

답: 나는 부대원들을 위해 창가(娼家)를 한 채 짓고 스스로도 이용했다.

문: 여자들은 그 창가에 가는 것을 수락했는가.

답: 수락한 자도, 안 한 자도 있었다.

문: 거기서 몇 명이나 살았나.

답: 6명이다.

문: 그중 몇 명이 강제로 거기 들어가게 됐나.

답: 5명이다.

문: 왜 여자들은 창가에 들어갈 것을 강요받았나.

답: 그들은 헌병대를 공격한 자들의 딸이었다.

문: 그럼 여자들은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한 벌로 창가에 강제로 들어가게 됐다는 건가.

답: 그렇다.

이 문답의 바로 앞부분에는 헌병대를 공격하려 한 현지 주민들을 학살한 내용이 나온다.

모아 섬 바로 서쪽에 있는 포르투갈령 동티모르 섬의 사례는 진주해 온 일본군이 지역 수장에게 위안부 모집에 대한 협력을 강요했음을 보여 준다. 그 모습을 목격한 포르투갈 의료사무원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946년 6월)

“나는 일본인이 지역 수장에게 원주민 여자아이들을 창가로 보내라고 강요한 많은 장소를 알고 있다. 그들은 수장이 여자아이들을 안 보내면 곧바로 일본인이 수장의 집에 들어가 친척 여자들을 위안소로 보내겠다고 말하며 협박했다.”

인도네시아 보루네오 섬에서는 해군이 위안소를 직접 관리하고 ‘특경대’(헌병대에 해당)가 위안부를 모으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1946년 7월). 이곳의 사례는 1992년 일본의 자유기고가가 네덜란드 현지에서 정부자료를 입수해 ‘세카이(世界)’지에 발표했고 네덜란드 정부가 1994년 1월에 정리한 보고서에도 포함돼 있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 마겔랑의 사례(1946년 5월)에서는 일반 수용소에 억류돼 있던 당시 25세 네덜란드 여성이 다른 젊은 여자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인도돼 3주간 창루(娼樓)에 갇혀 강제로 일하다가 한 일본군 장교에 의해 일반 수용소로 돌려보내지기까지의 체험을 생생하게 말하고 있다.

“(1944년 1월 28일 일본군에 의해 일반 수용소에서 다른 수용소로 옮겨진 우리는) 2월 3일, 다시 일본인 의사에게 건강검진을 받았다. 거기서 우리는 일본인을 위한 창루에 가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밤 창루가 열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브레커 부인과 나는 모든 문과 창문을 잠갔다. 오후 9시경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잠가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었다.… 한 병사를 데리고 들어온 헌병은 내게 ‘만일 거부하면 당신들 남편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협박했다. 창루는 평일에는 일본 장교, 일요일 오후는 하사관들을 위해 열렸다. 일요일 오전은 병졸을 위해, 때때로 일반 일본인도 상대했다. 늘 거절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밖에 프랑스 검찰대가 제출한 베트남 랑선의 예, 중국 구이린(桂林)의 공장 노동자 모집으로 속인 사례 등도 제시돼 있다.

하야시 교수는 도쿄재판 기록이 아니더라도 일본군이 중국에서의 위안부 모집에 관여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일본 정부가 1992년 공표한 공문서에 포함돼 있다고 지적했다. 1938년 3월 당시 육군성 부관이 중국 대륙에 주류하고 있는 군대의 참모장 앞으로 보낸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1938년 3월) 이라는 통첩에는 ‘△(군위안부) 모집은 파견군이 통제하고 담당자의 인선을 주도하게 한다 △모집하는 지역의 헌병, 경찰당국과 연대를 밀접히 할 것’이라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다.

요코하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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