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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28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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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일본에서 230여만 부가 팔려 연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국가의 품격’ 저자 후지와라 마사히코(藤原正彦·64·사진) 오차노미즈대 교수. 본디 수학자인 그는 27일 저녁 연구실을 찾아간 기자에게 한국과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그때’란 1945년 일제가 패망하던 두 살 때를 뜻한다. 일본인들도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는 만주 태생이다.
그의 아버지 후지와라 히로토(藤原寬人·훗날의 필명 닛타 지로·新田次郞)는 일제강점기에 만주의 기상대에서 기술자로 일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만주로 밀려 내려오자 아버지는 26세였던 어머니께 5세, 2세, 그리고 생후 1개월 된 철부지 세 자식을 맡겨 귀국길에 오르게 하셨지요. 둘째가 바로 저였습니다.”
반도를 종단해 남으로 또 남으로 향하는 젊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의 머나먼 귀국길. 그것은 쓰레기통에서 감자 껍질을 주워 먹고 산중을 헤매다 농가의 헛간에서 밤을 새우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제 다리에는 어머니에게 끌리다시피 하며 산길을 걸을 때 생긴 흉터가 여러 군데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구걸과 날품팔이로 연명하는 모진 유랑 생활 끝에 어렵게 부산에 도착했고 결국 일본으로 가는 송환선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이듬해 9월. 1년여를 한반도에서 보낸 셈이다.
후지와라 교수의 어머니 데이 씨는 1949년 그 험난한 귀국과정을 책으로 펴냈다.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라는 제목의 이 책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다섯 개 출판사에서 판을 바꿔가며 출판했다. 한국에서도 1950년대에 ‘내가 넘은 38선’이란 제목으로, 2003년에는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청미래)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책에서도, 평소에도 어머니는 늘 ‘가난한 한국인들의 친절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때 죽은 목숨이었다’며 고마움을 표해 왔답니다. 부자들은 일부 차가운 태도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며 슬쩍 밥 한 그릇이라도 나눠주려 했죠.”
어쩌다 도둑질을 당하거나 적대적인 한국인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패전 전에 일본인들이 위세를 떨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38선을 넘으면서 산중을 헤매던 어느 날, 굵은 비까지 내리자 체온이 떨어져 모두 빈사상태였지요. 어느 농가에서 거지 행색의 저희 식구를 맞아들여 헛간에 새 건초를 깔고 자게 해 줬답니다. 그날 밤 그 집에서 쫓겨났더라면 저희는 모두 죽었을 겁니다.”
책이 유명해진 뒤 어머니는 1980년대에 북한 김일성 주석의 초대를 받아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때 귀국길에 신세를 많이 진 ‘김씨 아저씨’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 뒤로도 작가로 활동해 온 어머니는 현재 88세. 한국 나이로는 90세다. 생존해 있지만 최근 들어 거동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한다.
미국에서 발간된 ‘요코 이야기’가 한국에서 논란이 되었다고 설명하자 그는 “각자 경험한 것들이 다를 수 있겠지만”이라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늘 러시아인이나 중국인이 잔악무도했던 반면 한국인은 오히려 우리를 도와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한반도에서 보낸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의 책을 보면서 기억을 재구성했기 때문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그는 설명했다.
어머니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귀국길의 고생으로 인해 병상에 누워 있던 어머니는 유서를 쓰는 심경으로 책을 썼고 아직 어린 자녀들에게 읽히기 위해 초판본 3권을 각기 봉투에 넣어 보관해 뒀다. 후지와라 교수에게 읽힐 책의 첫 장에는 이런 편지가 적혀 있었다. ‘너는 너무 어렸으니 이 책에 나오는 얘기들이 기억이 안 나겠지. 하지만 넌 아주 강한 아이였단다. 앞으로도 평생 강하게 살기를, 엄마는 그것만을 기도한다.’
1980년 타계한 아버지 닛타 지로 씨도 귀국 후 나오키(直木) 상을 수상한 유명작가가 됐다. 아내의 책이 반향을 일으키자 “저런 체험담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거야? 그럼 나도…”라며 소설을 쓴 게 계기가 됐다. 아버지는 작가 생활을 하면서도 1966년까지 기상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지탱해 온 것이 대대로 ‘무사도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 ‘국가의 품격’에서 그가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무사도 정신’이다. 그가 말하는 무사도 정신의 핵심은 ‘약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비겁함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만주에서 귀국할 때 아버지는 ‘부하직원을 남겨두고 자신만 도망치는 건 비겁하다’며 그곳에 남았다. 결국 소련군에게 잡혀 중국에 1년간 억류됐다가 가족들이 귀국한 3개월 뒤에 일본에 돌아올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게 무사도 정신이죠.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 일에 관해서는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이야 죽건 말건 무사도면 다냐고요?”(웃음)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무사도 정신’에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연상하는 사람이 많지만 결코 그렇게 협소하거나 부정적인 개념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제목에 ‘국가’를 넣지 말걸 그랬나 싶기도 합니다.(웃음) 저는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던 것은 무사도 정신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무사도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약한 국가를 측은히 여기고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잃었기 때문에 이웃을 침략한 거죠. 일본은 한번 한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민족입니다. 더더욱 오늘날 본래의 무사도 정신을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최근 일본의 우경화 경향에 대해서는 “일본이 전쟁 당시 너무 오른쪽 극단으로 갔다면 전후에는 반대로 너무 자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쪽으로 갔다. 지금은 균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국애’라는 개념도 강조했다. 하지만 이 또한 지금 요즘 일본에서 일고 있는 ‘애국심’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애에서 시작되는 향토애, 조국애입니다. 자신의 가족과 향토, 조국에 자부심을 갖지 못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민족주의는 자국의 국익을 타국보다 우선시하지만 조국의 자연과 문화 전통 정서 등을 소중히 하는 조국애는 이웃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고 미래지향적인 것이지요.”
그는 철들고 나서 처음으로 지난해 12월 한국 땅을 밟았다. “내가 건너온 길을 가보고 싶어 판문점에 갔습니다. 철책 너머로 보이는 곳이 개성이라고 하더군요. 온통 벌거벗은 북쪽의 산을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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