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대선 오늘 결판…민심 현장을 가다

  • 입력 2006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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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貧者)를 위한 좌파 민족주의냐, 글로벌 시장주의냐.’ 2일(현지 시간) 치러진 멕시코 대통령선거는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선거 1주일 전에 실시된 최종 여론조사에선 좌파 후보인 제2야당 민주혁명당(PRD)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52) 후보가 우파인 집권 국민행동당(PAN)의 펠리페 칼데론(43) 후보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오차범위 이내였다. 선거 결과는 3일(한국 시간) 오후에야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수도 멕시코 시의 변두리에 있는 테피토 시장은 ‘혼란 속에서도 그럭저럭 굴러가는’ 멕시코 시의 축소판이었다. 1000개에 가까운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옷, 장난감, 학용품, 생닭, 영화 DVD, 명품 향수를 팔고 있었다. 티셔츠 1장이 한국 돈으로 2000원, 토르티야(옥수수 전병)로 만든 토산 음식이 700원….

멕시코 서민의 삶의 터전인 바로 여기가 오브라도르 후보에겐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다.

“정부가 부자들의 장난감이 아니다. 부패를 뿌리 뽑겠다. 사회보장제 확대로 서민의 허리를 펴주겠다.”

인구의 20%가 하루 수입 4달러 이하인 멕시코에서 오브라도르 후보의 이 공약처럼 솔깃한 말은 없다.

시장 곳곳에 오브라도르 후보의 상징색인 노란색 포스터가 나붙어 있었다. 경쟁후보의 파란색 포스터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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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 에르난데스(74) 할머니는 3페소(약 250원)를 내고 들어가는 유료 화장실의 관리원이다. 글을 쓸 줄 모르는 아들 둘은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로 남아 있고, 그녀는 딸 하나, 손자 4명과 지붕이 무너져 내린 집에서 산다.

할머니는 “(아들들은) 짐승처럼 일했고, 짐승처럼 대접받았다”며 미국을 원망했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장벽? 우리가 범죄자냐. 이러고도 미국과 잘 지내자니…. 난 내일 여기 사람들과 투표하러 간다. 몽땅 오브라도르 후보 지지자다. 부자들을 위해 정치하는 사람들은 쓴맛을 봐야 한다”고 흥분했다.

마리아 벨로르데스 로페스 폰세카(44)라는 이름의 학용품점 여주인도 좌파후보 지지자였다. 그가 멕시코시장(2000∼2005년) 시절 서민형 무이자 대출을 해 줬다고 했다.

키가 유난히 작은 알렉산드르 데 라로사(32) 씨는 장기판만 한 판자를 어깨에 멘 채 삶은 달걀, 멕시코 토산 과일을 팔고 있었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는 그의 입에서 ‘성장학파 경제학자’ 같은 말이 나왔다.

하루 11시간씩, 1년 365일을 꼬박 서서 일하는 그는 하루 100페소(약 8500원)를 번다고 했다.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외국인 투자도 유치해야 일자리가 생긴다고 했다. 통역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기자가 “시장통 사람들은 (우파 후보가)부자들 세금을 깎아준다고 했다면서 거품을 물던데…”라고 말을 꺼내자 그는 “그건 다 배부른 소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나처럼 절박한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라고 했다.

기자가 이곳에 도착한 건 선거 전날이었다. 도심의 오후는 비어 있었다. 선거법상 선거 3일 전에 모든 선거운동은 종료된다고 했다. 선거 3일 전부터는 사고 예방 목적인지, 음식점에서 술도 못 팔게 했다고 한다.

며칠 전 뉴욕타임스에는 ‘멕시코 선거 정국에 희한한 일이 생겼다. 아무 일도 안 생겼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사설이 실렸다. 호텔 직원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을 뿐 “그러게. 우리가 좀 달라졌나 보다”라고만 말한다. 선거 때마다 폭력과 시비가 난무하던 멕시코는 이미 옛날 얘기가 된 듯했다.

여하튼 이번 선거는 당락과 무관하게 오브라도르 후보의 선거로 기록될 것이다. 우파 후보의 공약은 이미 유권자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선거가 이미 ‘오브라도르 후보의 철학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냐’ 하는 국민투표처럼 변질된 탓도 있다. 공기업 개혁, 대기업과 고소득층 세금 감면을 통한 투자 촉진, 자유무역 확대를 통한 국부 증진이란 우파의 어젠다(의제)는 일상에 지친 멕시코인에겐 너무 긴 설명이 필요했다.

미국 언론도 그를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처럼 극단적 위험인물로 판단하지는 않는 눈치다.

그러나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윈스턴 처칠의 말을 인용해 오브라도르 후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의 문제는 뭘 몰라서가 아니다. 정확하지도 않은 것을 옳다고 너무 믿는 게 진짜 문제다.”

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美와 결혼 12년’ NAFTA 파경?▼

1994년부터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3국 간에 발효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멕시코 대선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좌파 민주혁명당(PRD) 소속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후보가 NAFTA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브라도르 후보가 당선된 뒤 선거 공약대로 NAFTA 합의문을 재검토해 멕시코에 불리한 부분에 대해 재협상한다는 방침을 강행한다면 미국과의 심각한 통상 마찰이 예상된다.

NAFTA는 멕시코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현재 멕시코의 연간 대미 수출액은 2000억 달러로 전체 수출의 75%를 차지한다. 멕시코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FDI)가 급증하면서 일자리도 많이 늘었다.

그러나 ‘NAFTA 효과’가 미국과 인접한 북부 지방과 수출을 많이 하는 대기업에 편중돼 경제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심해졌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멕시코 좌파 진영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면 이른바 ‘미국과의 12년 결혼’으로 표현되는 NAFTA 합의문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가장 쟁점이 되는 현안은 농산물 시장개방 일정. 특히 멕시코인의 주식인 ‘흰 옥수수(White Corn)’ 개방 시기가 임박하면서 농민들의 반발이 거세다.

NAFTA 합의문에 따라 멕시코는 2008년 1월부터 미국산 흰 옥수수를 수입해야 한다. 멕시코 정부는 그동안 여러 차례 미국에 흰 옥수수 개방 시기를 늦춰 달라고 요청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한편 오브라도르 후보가 당선돼도 NAFTA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이미 두 나라의 경제가 견고하게 통합된 상황에서 멕시코가 ‘12년 결혼’을 청산하고 ‘결별’을 선택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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