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수형]‘변호사 천국’의 그늘

  • 입력 2005년 12월 21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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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의 시내 중심가에서 차를 타고 서북쪽으로 10분쯤 가다 보면 발라드라는 곳이 나온다. 이곳의 한적한 요양원에 한국계 변호사 케빈 정(45) 씨가 1년 넘게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 3일 시애틀 동남쪽 킹 카운티 벨뷰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 주차장에서 머리에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범인은 동료 변호사 윌리엄 조이스(51)였다. 그는 정 변호사 뒤에서 총을 쏜 뒤 달아났다가 승용차 번호판을 기억한 목격자의 제보로 경찰에 검거됐다. 그는 1급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됐다.

15일 킹 카운티 지방법원에서 조이스 변호사에 대한 마지막 공판이 열렸다. 조이스는 그동안의 재판에서 총을 쏜 사실은 시인했지만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공소 사실을 부인했다. 살해의 고의는 없었으며 총격은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사건 당시 제보를 받고 현장에 도착했던 경찰관이 증언대에 섰다. 그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정 변호사에게 “당신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정 변호사는 “아무도 없다(Nobody)”고 대답했다고 경찰관은 증언했다. 그것이 정 변호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원한’도 없는데 왜 총을 쐈을까.

재판에서 진실이 드러났다. 조이스는 시애틀 인근 스노호미시 카운티 검사로 일하다 2000년 변호사로 전업했다.

조이스는 사건 수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세금도 못 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해결했다.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 선물가게 프랜차이즈권 분쟁 사건을 맡아 정 변호사와 맞서게 됐다. 정 변호사는 시애틀 일대에서 명성을 날리던 유능한 변호사였다.

조이스는 법정에서 정 변호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법원은 정 변호사의 요청에 따라 조이스에게 증거서류를 제출하라고 명령했으나 조이스는 응하지 않았다. 조이스는 이 일로 2000달러의 벌금 납부 명령을 받았다.

마지막 공판에서 조이스는 자신의 변호인이 “왜 쐈느냐”고 묻자 “그것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정 변호사가 법원을 통해 요구한 서류제출 마감시한을 앞두고 초조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총을 쏠 생각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변호사 천국’으로 불리는 미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 준다. 미국에는 변호사가 10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한다. 법정에서는 가장 비열한 책략을 쓰는 변호사가 이기는 정글의 법칙(jungle ethics)이 지배한다. 그렇다고 일반 시민이 변호사를 싼값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헝그리 로여(hungry lawyer·굶주린 변호사)’는 사자나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도 나돈다.

조이스는 조만간 배심 평결에서 유죄 평결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변호사 천국’에 대한 유죄 평결이 될 것이다.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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