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反엘리트주의 바람

  • 입력 2005년 6월 4일 03시 02분


《유럽연합(EU) 헌법이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잇따라 부결되면서 오랫동안 유지돼 온 유럽 정치권의 엘리트주의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엘리트주의의 퇴조는 단기적으로 유럽 통합에 걸림돌로 작용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유럽권의 정치 경제적 세력 강화에 오히려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 BBC 등 주요 외신이 2일 일제히 보도했다.》

유럽 엘리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보호주의적 경제정책.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대다수 유럽의 정치 엘리트들은 정부의 강력한 주도 아래 규제 강화, 세금 인상, 노동권 강화에 주력하는 정책을 펴 왔다. 문제는 이러한 보호주의 정책이 경제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

경제전문지 비즈니스위크는 “EU 헌법 부결은 비효율적인 경제정책을 고수해 온 유럽권 엘리트주의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라며 “앞으로 엘리트주의는 ‘삼각(三角) 퇴조’ 현상을 맞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첫째, 유럽정치 구도에서 헌법 부결은 ‘구유럽(Old Europe)’으로 대변되는 프랑스-독일 ‘쌍두마차’의 세력 위축을 몰고 올 전망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2001년 구성된 EU헌법 위원회에서 회원 구성원의 40% 정도를 차지하며 헌법 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맡아 왔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신흥공업국들은 연평균 4%대의 경제성장을 보인 반면 프랑스와 독일은 1%의 성장률에 그치며 경기침체에 허덕이고 있다. EU헌법을 주도했던 프랑스와 독일의 초라한 경제 성적표는 이들 국가의 영향력 축소와 함께 신흥국가들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둘째, 헌법 부결로 노동자와 이익집단이 주도해 온 사회주의 정책이 퇴조하고 성장주의 정책이 더욱 힘을 받을 수 있게 됐다. EU 헌법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역내 서비스업 개방이 가장 대표적인 예.

프랑스 독일 등은 서비스업 개방으로 동유럽의 저렴한 노동력이 유입될 것을 염려하며 반대해 왔지만 주변국들의 압력으로 조만간 찬성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

셋째, 헌법 부결은 유럽 국가들의 국내 세력판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유럽통합을 외치며 헌법 통과에 전력을 다했던 기존 엘리트 정치인들의 정치생명이 위태로운 반면 다시금 시장주의를 지향하는 지도자들이 부상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궁지에 몰린 반면 보수적 성향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중운동연합(UMP) 총재가 벌써부터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독일에서도 앙겔라 메르켈 기독교민주연합 당수에 대한 지지도가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를 크게 앞서고 있다. 개혁정책 실패로 위기에 처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역시 4월 연정 붕괴 이후 내각 재구성에 나섰으나 대중이 등을 돌린 처지다.

유럽 전문가들 사이에는 헌법 부결을 유럽 각국의 정치 사회적 불만의 표출이라는 표면적인 이유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조직적 반발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프랑스의 정치평론가 니콜라 바베레는 “헌법 부결은 유럽 엘리트주의에 대한 사형선고에 가깝다”면서 “엘리트주의에 대항한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대중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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