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간다"

  • 입력 2004년 8월 26일 16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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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미국 콜로라도 의과대학의 한 강의실.

작은 체구에 수줍은 표정의 대학원 조교 엘리자베스 퀴블러가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16살 소녀 환자와 함께 들어섰다. 그리고 학생들을 향해 말한다. "누구든 이 환자를 인터뷰해 보라"고.

머뭇거리던 몇몇 학생이 혈구수 측정치 등 '일반적인' 질문을 던지자 그 소녀 환자가 못 참겠다는 듯 학생들을 대신해 자문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 가지 못하는 것, 데이트 할 꿈조차 꿀 수 없다는 것,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까요?"

"왜 아무도 (내가 죽어간다는)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 걸까요?"

이날 여러 명의 학생들은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강의실을 나갔다.

퀴블러 조교가 뒤돌아서 나가는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

"이제야 과학자가 아닌 인간처럼 행동하는군요!"

수 세기동안 의학계에서 금기시됐던 '죽음'에 대한 연구와 불치병 환자에 대한 처우 개선 등을 요구했던 정신과 전문의 엘리자베스 퀴블러 박사. 그가 24일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뉴욕타임스는 25일 퀴블러 박사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고 장문의 추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 업적을 소개했다.

취리히 의대 졸업(57년) 후 미국인 의사 남편을 따라 이주한 뉴욕 근처의 한 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 그가 당시 목격한 광경은 비참한 것이었다.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환자들은 옷이 벗겨진 채 침대나 뜨거운 욕조통에 마냥 방치됐고 어린 불치병 환자들은 "약을 먹으면 나아질 것"이라는 의료진의 판에 박힌 이야기만을 들어야 했다.

이 같은 현실에 돌을 던진 것이 68년 출간, 이후 25개 언어로 번역된 퀴블러 박사의 저서 '죽음의 순간(On Death, And Dying)'이었다.

당시 시카고 의대 교수였던 그는 이 책을 통해 불치병 환자들이 안락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정신 치료 및 연구 필요성을 역설했다. 말기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시스템 창출의 배경에는 그의 이 같은 노력이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불치병 환자들이 거치는 정서적 과정을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이라는 다섯 단계로 분석한 이도 바로 그였다.

"병원이 살린 환자가 아니라 죽어나간 환자들의 이야기로 유명해지려는 것이냐"는 학교 병원 측의 냉담 속에서도 그의 연구에 대해 수많은 불치병 환자와 가족들의 격려가 빗발쳤다. 퀴블러 박사의 노력으로 80년대 들어서는 불치병 환자에 대한 연구 및 치료가 의학 교육계의 필수 영역으로 자리매김했다.

200여권의 관련 저서를 남긴 '죽음에 대한 전문가'인 그에게도 그러나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1995년 심장발작을 일으킨 뒤 전신마비로 고통 받아온 퀴블러 박사는 24일 애리조나주 스콧데일의 자택에서 자신의 임종을 예감했다. 그러나 평소 "죽음은 휴가를 떠나는 것과 같다"며 여유를 부려오던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간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었다.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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