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모든 적들에 맞서’…이라크전쟁 진실을 고발한다

  • 입력 2004년 5월 14일 16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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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강동영기자
그래픽 강동영기자

◇모든 적들에 맞서/리처드 A 클라크 지음 황해선 옮김/443쪽 1만4500원 휴먼&북스

“내게는 (백악관을 포함한) 어떤 정파에 대한 충성보다 미국민에 대한 충성이 우선한다.”

전(前) 대통령 테러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저자의 말이다. 그는 4월에 열린 9·11테러 진상조사 청문회에서 “오사마 빈라덴의 위협에 대해 백악관에 거듭 경고했지만 무시됐다”고 증언했다. 백악관은 출간 이후 줄곧 이 책을 의도적으로 무시해왔지만 책은 벌써 6주째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들어 있다. 이번 주는 논픽션 부문 4위.

저자는 1973년 국방부에 들어간 이래 2003년 은퇴할 때까지 30년간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에서 핵무기와 안보문제 전문가로 미국의 대테러 전략이 어떻게 전개돼 왔는지 실체에 가장 근접해서 지켜보아 왔다. 그는 이 책에서 80년대 이후 알 카에다의 형성 과정, 레이건 이후 4명의 미국 대통령이 취한 대중동 전략, 9·11테러부터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테러 전략의 혼선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 9·11테러, 막을 수도 있었다

클라크는 2001년 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알 카에다 지휘부 공격 계획을 보고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승인할 회의는 계속 지연되다가 9·11 발생 7일 전에야 열렸다. 클라크의 팀은 무인 정찰기 프레데터로 빈라덴을 사살하려 했지만, CIA가 반대했다. 민간항공기마다 보안요원을 탑승시키려던 계획은 FBI가 반대했다. 비행기 납치범 저격과정에서 보안요원이 숨질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미국은 9·11이 터진 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맞서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 지도자 마수드에게 손을 내밀려 했지만 그는 며칠 전 암살당하고 없었다.

○ CIA의 흔들림

빌 클린턴 대통령 당시 이라크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다. 클린턴은 그 응징으로 바그다드를 미사일로 공격하라고 지시했지만 명중 여부 파악에는 정찰위성이 필요했고 하루가 걸린다는 답을 받았다. 결국 클린턴은 직접 CNN에 연락해 요르단 지국 직원의 인맥을 동원했으며 명중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CIA는 위험한 ‘인간 정보망’ 형성을 꺼리고 지나치게 ‘기계 정보’에 기댔던 것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CIA는 과거 이란과 남미에서의 비밀활동으로 비난 여론에 휩싸인 뒤에는 ‘얻어맞은 아이처럼’ 수동적으로 됐다”고 말했다.

○ 부시와 클린턴

클린턴 재임 8년간 미국은 외국에서 테러 공격을 당한 일이 거의 없다. 치밀한 클린턴의 힘이 컸다. 그는 자정이 넘도록 케이블 방송뉴스를 체크하고, 참모들의 메모를 꼼꼼히 읽었다. 자기가 직접 대학교수들을 불러들이거나 정보원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참모들 사이의 사소한 견해 차이까지 다 파악하고 있었으며, 읽고 싶은 책은 출간 전에 출판사에서 원고를 받아와 읽기도 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어리석고 굼뜬 부자 애송이’처럼 보였다. 그는 자동차 스티커 광고처럼 아주 단순한 해법을 요구한다. 독서도 좋아하지 않는다. 일부 고위 보좌관들과의 대화에서 정보를 얻었으며, 10시만 되면 잠자리에 든다. 9·11 직후에는 알 카에다 지도부의 사진들을 백악관 벽난로 옆에 걸어놓고 한 사람이 잡힐 때마다 빨간 펜으로 X표를 그렸다. 클라크는 그 모습을 보노라면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고 말한다. 부시 대통령이 X표를 그리는 동안 알 카에다 조직원은 계속 새로 생겨나고, 미국은 항상 뒷북만 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클라크는 1999년의 아슬아슬했던 대통령 선거 결과가 달라졌다면 미국은 지금과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모든 적들에 맞서(Against all enemies)’는 미국 공직자들의 취임 선서 구절이다. 클라크는 “미국 헌법의 수호를 위해” 이 선서의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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