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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9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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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1993년 7월 자민당의 38년 지배체제가 붕괴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 56명이 탈당해서 비(非)자민당 정권인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을 출범시켰다. 호소카와 당시 총리는 한일 정상회담에서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침략전쟁이었고 한국에도 창씨개명, 강제동원 등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며 사과했다.
▼온건보수에 맞서 우경화 전략 ▼
이러한 인식은 95년 8월의 ‘무라야마 담화’를 거쳐 현재 일본의 민주당으로 계승됐다. 이 같은 온건보수 세력에 맞서 93년 이후 자민당은 자신들의 특징인 우익적 성격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본정부 우경화의 배경이자 현재의 야스쿠니 문제의 핵심이다.
93년 8월에 발족된 자민당 내 ‘역사검토위원회’는 95년 8월 15일 침략전쟁을 사과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담화와 때를 맞춰 ‘태평양전쟁의 총괄’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태평양전쟁을 ‘자존자위의 전쟁이자 아시아를 백인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정당화했다. 호소카와, 무라야마 전 총리에 의해 일본정부의 공식견해가 ‘침략 사과’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뒤 ‘역사검토위원회’는 역사 왜곡의 근원지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97년 탄생시켰다. 98년 10월 한일 양국은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했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공문화했으나 자민당 내의 ‘태평양전쟁 정당화’ 움직임은 사실 93년부터 계획되어 온 또 하나의 강력한 흐름이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 정당화와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전몰자들의 전투행위를 미화하고 칭송한 뒤 신으로 합사한 야스쿠니신사는 태평양전쟁 정당화의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당으로 집결한 반(反)자민 보수세력에 맞서 자민당이 강조하는 것은 애국심, 일본역사와 문화의 우월성, 지방교육위원회의 교육권 강화 등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신사 참배는 일본의 문화이니 타국이 비판할 이유가 없다”는 왜곡된 일본문화론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지난해 중의원선거에서 대약진한 민주당을 견제하기 위해 전통의상 차림으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등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한국은 야스쿠니신사에 2만명에 달하는 한국인 전몰자가 합사되어 있는 나라로서 당연히 비판논리를 체계화하는 동시에 해결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야스쿠니신사에는 한일병합에 항의해 일어선 한국 의병들과 싸우다 전사한 일본 군인들이 신으로 모셔져 있고, 수많은 한반도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보낸 A급 전범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조선총독이 신으로 모셔져 있다. 이들이 신이라면 조선의 의병들은 악귀가 되며 그들의 한국지배는 정당화된다.
▼별도의 추도시설 건립 촉구를 ▼
또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이에 항의하는 대다수 일본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반민주적 행위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행위는 주변국에 위협을 준다. 이러한 관점들을 체계화해 일본을 꾸준히 설득해 나가야 한다.
일본 내에서도 야스쿠니신사를 대신할 만한, 종교색 없는 전몰자 추도시설을 건설하자는 의견이 수차례 거론됐다. 고이즈미 총리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이런 국민시설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고, 최근 “야스쿠니신사를 대신하는 시설을 건설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은 이 점을 부각시켜 일본인들이 참배할 수 있는 별도의 시설 건설을 강력히 촉구해야 한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일어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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