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關東대지진 조선인학살 80주년]日교수가 밝히는 사건전모

  • 입력 2003년 8월 29일 18시 50분


마쓰오 쇼이치 교수
마쓰오 쇼이치 교수
《9월 1일은 1923년 일본 도쿄(東京) 일대에 ‘간토(關東)대지진’이 발생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1주일 동안 6000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됐다. 군대가 학살에 가담한 증거가 최근 연구 결과 속속 드러나면서 일본 정부의 책임론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한일관계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80년 전의 비극에 대해 반드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및 중국인 학살사건은 일본 역사상 최대의 오점입니다.”

간토대지진 연구로 명성이 높은 마쓰오 쇼이치(松尾章一·73) 호세이(法政)대 명예교수는 군대를 동원해 학살극을 벌이고 유언비어에 현혹된 시민들이 학살에 가담한 사실에 대해 일본 정부와 국민은 책임을 느끼고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7세 때 조선인 학살을 목격한 일본인 화가 가야하라 하쿠도가 남긴 스케치. 군과 자경단원에 의해 살해된 조선인들의 시신이 즐비하다. -도쿄=조헌주특파원

마쓰오 교수에 따르면 대학살은 일반인이 조직한 자경단이 저지른 것으로 치부돼 왔지만 실은 계엄령 아래 치안을 장악한 군대와 경찰이 직접 개입했다. 그는 군대가 학살에 개입한 증거를 담은 저서 ‘간토대지진과 계엄령’을 9월 1일자로 발매한다.

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明治)유신 이래 일본 정부가 다른 아시아 민족에 대한 차별과 멸시의 사상을 국민에게 주입한 결과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군대까지 가담한 조선인 학살=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도둑질을 하고 불을 지른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에 현혹된 일본인들은 도시빈민들로 구성된 자경단을 중심으로 ‘조선인 사냥’에 나섰다.

당시 도쿄 일대에 살던 조선인 3만명 가운데 6000여명이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9월 1일부터 6일 사이에 무차별 학살됐다. 하지만 조선인 학살이 자경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최근 연구 결과 드러났다.

겁을 먹고 경찰서를 찾아 보호를 요청한 사람은 경찰서에서, 군에 연행된 조선인은 수용시설에서 ‘폭동 방지’라는 명목 아래 무참히 살해됐다.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시신은 대부분 하천에 버려지거나 암매장됐다. 요코하마 등지에서 노동을 하던 700여명의 중국인도 희생됐다.

일본 자경단과 경찰이 살해된 조선인의 시신을 막대기로 헤쳐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당시 ‘간토계엄사령부상보’에는 9월 1일 밤부터 6일 오전 7시반 사이에 ‘경비를 위해 무기를 사용’(조선인 학살을 지칭)한 기록이 20건이나 된다. 특히 9월 3일 오후 3시경 도쿄 오시마(大島)정에서는 포병과 기병대원 83명이 조선인 200명을 ‘처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출동해보니 경찰관 40∼50명이 조선인 200명을 에워싸고 있었다. 처리문제를 협의하던 중 군인 3명이 총으로 조선인 3명을 구타한 것이 발단이 돼 실랑이를 벌였다. 군대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조선인을 모두 살해했다.’

▽학살 배경=당시 내무대신(장관) 미즈노 렌타로(水野連太郞)는 3·1독립운동 때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인물. 이런 경험 때문에 대지진이라는 혼란 속에서 조선인들이 보복에 나설 것을 두려워했고 이것이 계엄령 선포의 배경이 됐다.

계엄 상태였던 점을 감안하면 ‘조선인 폭동’과 관련된 각종 유언비어는 민중 사이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지배권력 쪽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마쓰오 교수는 군부의 학살 가담에 대해 “일본사회 내의 조선독립운동세력,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혁명세력을 일거에 진압해 국가총동원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토양을 조성하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범죄 은폐=학살극이 벌어진 뒤 일본 사법부는 일부 사건에 대해 형식적인 재판을 가졌지만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야마다 쇼지(山田昭次·73) 릿쿄(立敎)대 명예교수는 재판이 형식적으로 치러진 이유에 대해 “일본군과 경찰이 ‘조선인 폭동’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직접 학살에 가담한 책임을 자경단에 떠넘기려는 속셈이었다”고 단정했다.

사이타마(埼玉)현 구마다니(熊谷)에서 벌어진 집단학살극의 피해자는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해 68~79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당시 사법부는 피살자를 15명으로 판단하고 용의자 35명을 기소했다. 이 중 34명은 1심 또는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됐으며 1명만이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야마다 교수는 “일본사회는 현재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가족문제에 매달리면서 일제강점기 징병징용이나 간토대학살 등으로 숨진 숱한 한국인의 비극을 외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한국정부 단 한번도 문제 제기안해▼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은 일본에서 ‘방재(防災)의 날’로 지정돼 있다. 80년 전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을 교훈 삼아 자연재해에 대비하는 체제를 갖추자는 취지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대피훈련이 실시되고 각 지방자치단체는 위험 시설물을 일제 점검한다.

올 들어 일본 열도에서 크고 작은 지진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방재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언론은 ‘일본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가’를 주제로 다양한 특집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80년 전 이날 적어도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억울하게 학살된 사실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10만명 이상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내고 45만채의 주택이 불에 탄 재해’로만 간토대지진을 기억할 뿐 조선인과 중국인의 무고한 죽음은 애써 외면하는 것.

일본 정부는 양심적인 일본 인권단체와 교포들의 진상규명 및 사죄 요구에 대해 아예 대응하지 않고 있다. 학살 사실 자체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사죄와 피해보상이 쟁점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다.

교포 인권단체 관계자들은 “일본 정부의 무관심보다 한국 정부의 차가운 태도가 더 섭섭하다”고 말한다. 동포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국가적 범죄인데도 역대 정권에서 단 한번도 이 문제를 일본 정부에 제기한 적이 없다는 것은 역사를 지나치게 가볍게 대하는 태도라는 것.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규명위원회’의 김종영(金宗永·40) 위원장은 “히틀러가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에는 기념관이 들어섰고 피살자수가 조선인의 10% 정도인 중국 당국도 진상규명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며 “한국에 그 흔한 기념관이나 추모시설이 한 곳도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도쿄 인근에만 100여곳에 이르는 학살 현장에는 지금도 상당수의 유골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발굴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

김 위원장은 “최소한 한국 정부가 일본측에 공동 진상조사를 요구해 유골을 수습할 길을 트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넋을 기릴 추모관을 만드는 데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현장 사진-스케치 등 80년前 참상 생생▼

도쿄 신주쿠(新宿)구 코리아타운에 있는 ‘고려박물관’은 8월 20일부터 10월 14일까지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관한 그림과 스케치를 모아 전시회를 열고 있다.

전시작품들은 아라이 가쓰히로(新井勝弘) 센슈(專修)대 교수 등 회원들이 각종 박물관 등을 찾아다니며 창고에 있는 것을 찾아내 사진으로 찍어온 것들이다. 초등학생의 공포가 배어 있는 듯한 색연필 그림, 청년 화가가 수채화에 담은 집단학살 현장 스케치 등은 80년 전 조선인 대학살의 참상을 생생히 증언해준다.

안내를 맡은 70대 일본인 여성 자원봉사자는 “요즘 일본 사람들이 너무 역사를 몰라 큰일”이라며 애써 준비한 전시회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을 안타까워했다. 관람객은 하루 평균 20명 안팎.

이 박물관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 촉진을 위해 일본인이 만든 비영리단체가 운영 중이다. 이사장은 기독교계 원로 사회활동가 쇼지 쓰토무(東海林勤).

500여명의 회원이 연간 5000엔(약 5만원)의 회비를 낸다. 회비로만 운영하다 보니 운영이 힘들다. 전시회는 물론 한글강좌, 역사문화 강연, 교류회 등도 실시하고 있다. 홈페이지 www.40net.jp/∼kourai/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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