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외신]<4>러 프로그래머 스클랴로프

  • 입력 2002년 12월 12일 18시 15분


“나는 결코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다.”

1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연방지법. 한 청년이 러시아어 억양이 섞인 서툰 영어로 진술을 시작했다. 그는 모스크바공대 조교수이며 러시아의 벤처기업인 엘콤소프트의 연구원인 드미트리 스클랴로프(27·사진). 지난해 7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해커 관련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입국했다가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의해 체포된 그는 1년이 넘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 법정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상대는 포토숍으로 유명한 미국의 거대 소프트웨어개발 회사인 어도비와 미국 사법 당국. 종이 대신 전용단말기나 컴퓨터 등을 통해 책을 읽는 전자책(e북)이 소송의 발단이었다.

이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는 어도비는 e북의 내용을 무단으로 복사하거나 인쇄 전송하지 못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상용화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얼마 뒤 어도비는 경악했다. 이름도 생소한 엘콤소프트의 스클랴로프씨가 이 복사방지 장치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어도비는 즉각 1998년 제정된 미국의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DMCA)’을 적용해 스클랴로프씨를 제소했다. DMCA는 영화사나 음반사 등 저작권자의 권리만을 지나치게 옹호해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주장하는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가들에게는 대표적인 ‘악법’. FBI는 때마침 미국에 입국한 스클랴로프씨를 이 법을 적용해 체포했다. DMCA에 따른 첫 형사 재판이 열리게 된 것.

러시아 정부도 발끈했지만 전 세계 네티즌들은 즉각 “스클랴로프씨를 석방하고 DMCA를 철폐하라”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항의 시위에 나섰다.

스클랴로프씨는 법정에서 “나는 e북 사용자들이 어느 컴퓨터에서든지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을 뿐이며 러시아에서 이는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체포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항변했다.

더욱이 엘콤소프트의 알렉스 카탈로프 사장이 “사실은 FBI와 미 법무부도 우리 소프트웨어를 구입했다”고 폭로하면서 머쓱해진 미 사법당국과 어도비는 협상을 통해 스클랴로프씨 개인에 대한 제소를 취하해 석방하는 대신 엘콤소프트를 피고로 만들었다. 이제는 증인 자격으로 법정에 서게 된 스클랴로프씨는 여전히 “나의 행동은 적법했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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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비록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디지털시대의 저작권 문제와 자신들의 사법체계를 외국인에게 무리하게 들이대는 미국의 오만 등 되짚어 볼 만한 숱한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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