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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8월 26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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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컴퓨터인데요.”
“꺼내서 한번 켜보세요. 또 이건 뭐죠.”
“음료수입니다.”
“혹시 독극물은 아닌지 확인해야 합니다. 뚜껑을 열고 마셔보세요.”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과 라과디아 공항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 내용이다. 미국 내 어느 공항이나 마찬가지다. ‘노란머리 흰 피부가 아니면 더 들볶인다’는 소문대로 중동계나 아시아계는 더 심한 검색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발을 벗어 보라’ ‘벨트의 금속부분을 젖혀 보라’는 요구를 받고 당혹해하는 아시아계 등 유색인종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외교관도 예외가 아니다. 불평을 했다간 다른 방으로 안내돼 더 심한 검색을 받기 십상이다.
9·11테러 이후 눈에 띄는 가장 큰 변화는 공항 검색의 강화다. 그래도 요즘은 검색 시간이 다소 짧아진 편이다. 검색대가 증설됐고 직접검색요원 외에 다른 방에 있는 요원들이 카메라를 통해 미심쩍은 여행객을 면밀히 추적하기 때문이다.
테러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이 같은 불편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나타내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 한번은 두 자녀와 함께 비행기를 타려는 미국인 부인이 정밀검색을 당했다. 검색대 위에 놓인 핸드백과 아이들 배낭이 모두 뒤집어졌다. 그러나 부인은 아이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다독였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안전한 거란다.”
맨해튼의 오피스 빌딩에 대한 경비도 훨씬 강화됐다. 입주회사 직원의 경우 출입증을 목에 걸고 다녀야 한다. 방문객은 신분증을 보여주고 임시출입증을 받아야 한다. 일부 빌딩은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직접 로비로 내려와서 방문객을 데리고 들어가야 한다. 빌딩 방문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누군가가 카메라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
9·11 항공기 납치범들이 유학생 비자로 미국에 머문 것으로 드러나면서 유학생에 대한 감시의 눈길도 매서워졌다. 미 이민귀화국(INS)은 유학생 비자 신청자에게 신원정보 및 과거 취업기록을 상세히 적어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또 각 대학에 학생이나 방문교수 비자로 입국한 외국인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강의시간표를 확보해 이를 전산입력하라고 요구했다. 유학생이 입국 후 한달 내에 등록하지 않는 경우, 등록 후 첫 강의부터 나오지 않거나 중퇴 또는 학적변동이 생기면 대학측은 이 사실을 INS에 통고해야 한다.
INS는 수시로 불법체류자 단속 계획을 발표한다. 미국 내 1000여만명에 이르는 불법체류자들은 이때마다 하얗게 겁에 질린다. 관광비자로 입국해 기한을 넘겨 거주하고 있다는 뉴욕 퀸즈의 한인 불법체류자는 “과거엔 문제삼지 않았던 비자기한에 대해 까다롭게 단속한다는 소문이 많다”면서 “단속에 걸리면 요즘 분위기로 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렵기만 하다”고 털어놓았다.
NS는 영주권자를 포함해 모든 외국인이 이사를 하면 1주일 내에 신고하도록 했다. 종전에는 운전면허국에서 한 달 내 운전면허증을 바꾸면 됐지만 이젠 신고 날짜를 어기면 벌금을 물거나 심지어 영주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아메리칸 드림’의 미국이 점점 ‘닫힌 나라’가 돼가고 있다.
‘인권이냐 안전이냐.’ 미국이 대(對)테러전을 수행하면서 정당한 근거없이 중동계 미국인을 구금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미국 언론들이 문제를 제기하며 쓰는 표현이다. 특히 ‘테러리스트의 형제’쯤으로 여겨지는 중동계는 많은 수난을 겪었다.
시리아 출신 공장근로자 말렉 자이단(44·뉴저지주)도 그 중 한 사람. 전과라고는 교통신호 위반밖에 없는 그의 집에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찾아와 이것저것 캐물었을 때 자이단씨는 솔직하게 비자 만료 사실을 털어놓았다가 체포됐다. 40일간 구금됐다 풀려나 INS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그는 “추방될 확률이 50%”라면서 불안에 떨고 있다.
9·11 이후 자이단씨와 같은 경우에 처한 사람이 1100명을 넘어섰다. 대부분 아랍이나 중동 또는 남아시아 출신의 이슬람 신도들이다. 상당수는 수개월 동안 테러조직과의 연계 여부 등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테러 혐의는 고사하고 그 어떤 범법행위와 관련해서든 기소된 사람은 많지 않다. 이들 중 74명 외엔 이달 초 모두 풀려났다. 미 정부는 법원으로부터 ‘구금자 이름을 공개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테러조직을 이롭게 한다’면서 이를 거부하고 있다.
존 애시크로프트 미 법무장관은 이달 초 “나도 다른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예방적 단속의 확산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면서도 “모든 구금자는 형법 이민법 위반 또는 법원이 발행한 증인영장 등 근거가 있다”고 이들에 대한 법 집행을 두둔했다. 그러나 이민자 및 시민의 권리 옹호론자들은 “구금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미군이 아프간 전쟁에서 체포해 관타나모에 억류하고 있는 포로는 39개국의 534명.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들을 ‘적국 전투원’이라고 규정해 전쟁포로 지위도 인정하지 않아 인권 침해 시비를 불러왔다. 인권단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국제법에 정해진 대로 법적 조력을 받고 합법적인 법정에서 구금에 대항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네소타 대학 정치학과 캐트린 시킨크 교수는 한 논문에서 “시민권과 법에 의한 지배에 대한 약속이야말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미 행정부의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인해 훼손돼선 안 된다”고 전제하고 “알 카에다 조직원 재판도 국제재판소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9·11 이후 미 전역에는 성조기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 커다란 재앙 앞에서 같은 운명임을 깨닫듯 테러 공격을 당하면서 애국심도 깊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편이 아니면 적’ 식의 대응으로 미국은 세계와 동떨어져 혼자서 다른 길을 간다는 지적도 많다. ‘9·11의 의미’를 주제로 한 학회에서 터키의 야사르 부유카니트 장군은 “오늘의 해법이 내일의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표현을 썼다.
<9·11 이후 바뀐 미국인의 8大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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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성조기 물결 = 관공서 빌딩은 물론이고 가정집에도 게양하고 차량에도 부착. 성조기 디자인 활용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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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오피스 빌딩, 호텔, 놀이공원도 출입 어려움 = 웬만한 빌딩에선 출입증을 받아야 엘리베이터 탑승 가능. 놀이공원 운동장 등에서도 배낭이나 손가방 등의 내용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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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공항마다 긴 줄 = 승객들이 긴 줄로 늘어서 강화된 검색을 받는다. 무작위 추출해 구두까지 검사. 칼처럼 생긴 물건 등 기내 반입금지.
④뉴스 시청률 상승 = 테러 경계령 등 확인 위해 케이블 뉴스 가입자 늘고 저녁 뉴스 시청자 증가.
⑤도서관 서점도 관리대상 = 당국이 요구하면 책 대출상황 등 보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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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이민자들 수난 = 범죄사실 없이 구금되거나 비공개 처리과정을 거쳐 추방당하기도 한다.
⑦유학생에 감시의 눈길 = 대학측은 당국에 유학생의 인적사항 학업상황을 보고.
⑧경찰 소방대원 인기 = 마크 들어간 모자 티셔츠 인기. 지원자 증가.
▼한인희생자 유족 '슬픔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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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받은 것도 주는 것도 없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김평겸 ‘9·11 한인유족회’ 회장(61·뉴저지주 레오니아 거주)은 작년 ‘9·11 테러’로 잃은 둘째아들 앤드루(한국명 재훈·당시 26세)에게 사회 곳곳에서 위로를 보내오는 것을 보고 ‘갚으면서 살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앤드루 이름을 딴 장학재단 설립을 이미 마쳤고 ‘9·11’ 1주년 직전에 장학사업의 내용과 추진인사들을 발표할 겁니다. 앤드루가 생전에 번 돈과 보상금, 각계 성금 등을 전액 기금으로 쓸 겁니다.”
30년 전 이민와 뉴욕 할렘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돈을 헤프게 쓰지 않기로 소문난 김 회장은 장학기금 액수에 관해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수십만달러(수억원)는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컬럼비아대 산업공학과 출신인 앤드루는 세계무역센터(WTC) 노스타워 93층에 있는 뮤추얼펀드 회사 프레드 앨저 매니지먼트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직장생활 18개월만의 일이었다. 사고 시각 세탁소에 있던 김회장은 TV에서 비행기의 빌딩 충돌 소식을 들었으나 무심히 넘겼다. 두 번째 비행기의 충돌모습을 본 뒤에야 앤드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불통이었다.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 의사인 장남 윌리엄(한국명 재호·29)이 현장에 달려갔지만 실종 소식 외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장남 윌리엄이 김회장과 부인 이화옥씨(57)를 설득하고 나섰다. ‘앤드루의 몫을 우리가 쓰지 말고 그의 이름으로 남기자’는 제안에 어머니 이씨는 “막내가 떠나갔는데 보상금으로 집을 사겠느냐 차를 사겠느냐”면서 기꺼이 동의했다.
앤드루가 다니던 뉴저지 웨인의 베다니 교회는 다음달 8일 뉴저지주 버겐카운티의 ‘9·11’ 희생자 147명을 위한 진혼곡 추모연주회를 갖는다. 당초 앤드루를 추모하기 위한 행사로 시작됐는데 김 회장이 한인 희생자 18명의 유가족들을 모두 초청하자고 제안했고 이 소식을 들을 카운티측에서 미국인 희생자 유가족의 참석을 희망해 행사 규모가 커졌다.
‘9·11’의 한인 희생자는 모두 21명. 그 중 18명이 유족회 모임을 갖고 있다. 김 회장은 “비탄에 잠긴 유족들을 추슬러 모임을 만들고 합동묘역 건립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한인 희생자 가운데 유일한 한국 주재원인 구본석 LG화재 뉴욕지점장(당시 42세)의 유가족은 뉴저지에 계속 살고 있다. 지난달 인근 데마레스트로 집을 옮기면서 딸이 “아빠 흔적을 놓고 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흐느껴 또한번 눈물 바다가 됐다. 부인 조윤호씨(38)와 두 딸은 지난해말 아일랜드 구씨의 형님 댁에 머물고 있던 시어머니를 방문해 석달 동안 차마 전하지 못했던 사고 소식을 눈물로 털어놓았다. LG화재 관계자는 “여전히 주재원 가족 비자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가족의 생활이 안정되려면 영주권을 받는게 급선무”라면서 “회사 차원에서 지원방안을 찾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