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월가 브로커의 두개의 인생

  • 입력 2002년 2월 9일 15시 53분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내가 아니야.”

미국 클리블랜드시 교외의 부자동네인 게이츠 밀스의 빅토리아풍 저택에 사는 새러 에머미는 지난달 12일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하루 전 집을 나간 동거남 프랭크 그루터더리어(44·사진)로부터 온 것이었다. 편지는 이어졌다. “조 블랙을 기억해봐.”

조 블랙은 98년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조 블랙의 사랑(Meet Joe Black)’에 나오는 주인공. 저승사자로 인간세계에 내려온 조 블랙은 죽은 남자의 몸을 빌려 여의사와 사랑을 나눈다. 이 편지를 끝으로 그루터더리어씨는 영영 사라졌다.

그루터더리어씨는 한때 월가 굴지의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에 연간 600만달러의 수수료 수입을 올려주던 스타 증권 브로커였으나 지금은 고객예탁금 1억2500만달러를 빼돌린 혐의로 연방수사국(FBI)의 추적을 받는 도망자다. 엔론사태에 이어 올퍼스트 파이낸셜에서 일어난 대형 금융사기 사건으로 월가의 공신력을 뒤흔든 인물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8일 1면 기사를 통해 그루터더리어씨의 희대의 사기극을 파헤쳤다.

시카고 근교 엘긴의 86세 노파 골더 스타우트는 그루터더리어씨를 멋진 신사로 기억했다. 그에게 맡긴 재산은 250만달러로 불어나 있을 것으로 믿었고, 식사에도 자주 초대하고 집에 들러 문단속까지 해준 그는 어느 모로나 인정 많은 신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사라졌고 거래은행이었던 리먼 브러더스사로부터 자신의 은행잔고가 8만6000달러밖에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감쪽같이 당한 것이다.

피해자들은 같은 이탈리아 출신이 많았다. 파지오 가문은 10년이 넘은 단골 고객이었다. 거의 1000만달러를 그를 통해 투자했다. 지금 잔고는 고작 4200달러. 그를 친아들처럼 여겼던 파지오 가문은 할말을 잃었다.

그의 수법은 고객들의 예탁금을 자신의 계좌로 빼돌리고 고객들에게는 자산이 늘어난 것처럼 위조통지서를 보내는 것. 그는 무려 15년 동안 여러 증권사를 전전하며 이런 식의 사기행각을 계속해 왔다.

대저택에 스키리조트의 별장, 개인 제트기, 고급 승용차를 가진 멋진 플레이보이였던 그의 삶은 온통 거짓투성이였다. 노스웨스턴대 켈로그 경영대학원을 수석 졸업했다는 학력도 거짓이었다. 그는 철저히 두 사람의 삶을 살았다.

그는 도피 중 FBI에 편지를 보내 “회사는 탐욕에 눈이 멀어 나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했다”고 비웃었지만 월가의 증권사들은 이번에도 사기꾼 한 사람에게 철저히 농락당할 만큼 허술했다.

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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