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평화재단 남북포럼]"일방적 햇볕보다 韓-美전략 절충을"

  • 입력 2002년 2월 6일 18시 13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한 이후 한반도 주변 기류가 급격히 요동치고 있다. 북-미 간의 대치구도 격화와 함께 햇볕정책을 둘러싼 한미 간의 이견도 표면화되고 있다.

동아일보와 21세기평화재단(이사장 권오기·權五琦 전 통일부총리)은 20일의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미 갈등의 배경과 부시 행정부의 신외교정책을 진단하고 위기상황 타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남북포럼’을 개최했다.

6일 동아일보 광화문사옥에서 열린 포럼에는 21세기평화재단 이사인 안병준(安秉俊) 전 연세대교수와 한승주(韓昇洲) 고려대교수가 참석해 대담을 가졌다.

동아일보 부설 ‘21세기평화재단·평화연구소’는 ‘궁극적 목표는 통일이지만 우선은 평화공존이 먼저’라는 취지 아래 학술 문화사업과 민간교류 등을 통해 한반도의 화합과 번영을 촉진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0년 4월 창립된 공익재단이다.》

▽한승주 교수〓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이후 한미 간, 북-미 간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안병준 박사〓부시 대통령이 강경한 경고를 한 것은 반(反)테러 전쟁을 확대해 그것을 미국 외교정책의 축으로 삼겠다는 점을 해외에 알리고, 군비지출 확대에 대한 의회와 국민의 지지를 받겠다는 것이죠. 특히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킨 것은 빌 클린턴 행정부와 달리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재래식 군사위협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한 교수〓‘악의 축’ 발언이 연두교서에서 나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로 미국의 세계전략, 특히 테러와의 전쟁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악(evil)’이라는 표현을 했는지가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과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공화당 사람들이 갖는 세계관, 즉 악과 선의 대결이라는 인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악에 대한 도덕적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죠. 북한이 여기에 포함된 것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 수출 문제에 대해 미국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과거엔 북한의 미사일을 한반도와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지만, 9·11 테러 이후엔 미국에 직접적인 위험이 된다고 보게 된 것입니다.

▽안 박사〓동감입니다. 냉전시대 미국의 외교정책은 공산주의 대 자유민주주의였고 그래서 공산주의는 나쁘고 민주주의는 좋다는 게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무너진 뒤 미국 외교정책의 초점이 흐려졌다가, 이번 대(對)테러 전쟁을 계기로 세계전략의 핵심개념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특정국가를 대상으로 한 전략이 아닌, 능력(capability)에 근거한 전략을 구사하겠다는 게 미 국방부의 국방전략 검토보고서에 나옵니다. 북한 이란 이라크 등 3개 국가가 대량살상 능력을 많이 갖고 있는 데다 테러 방조 의혹이 있는 만큼 이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한 교수〓9·11 테러 이전 미국의 대외정책은 일단 한반도를 포함한 분쟁지역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헤게모니,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축하는 게 중요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필요하면 평화를 위해 무력 사용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으로 바뀐 것입니다. 과거에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하거나 핵무기를 확보했을 경우에나 미국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스커드미사일이나 세균 화학무기도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악의 축’ 발언은 과잉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 꽤 긍정적인 호응을 받고 있다고 봅니다.

▽안 박사〓미국은 반테러를 위해 연대하되 필요하면 미국 단독으로, 또 선제공격도 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방대한 국방비 지출을 의회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좋든 싫든 앞으로 2, 3년 동안 미국이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시대가 옵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 교수〓우리 정부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한반도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F15 전투기 구매를 위한 압력용이라든지, 북한에 대한 협상용이라든지, 군산복합체의 지원이라든지, 엔론사건 무마용이라든지 하는 시각으로 보는 거죠.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발언에는 전체적인 미국의 전략과 정서가 반영돼 있습니다. 햇볕정책을 놓고 본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그것이 한미동맹이나 주한미군의 안전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 반대할 이유도 없고 앞으로도 지지한다고 얘기할 것입니다. 다만 한국이 북한을 대변하는 듯한 입장에서 변호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의도와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 박사〓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과의 긴장완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 만큼 초강대국인 미국의 전략과 우리의 대북전략에 시각차가 있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 중진국이 초강대국인 미국의 정책을 설득해 바꾸려 할 때 그것이 가능할지 생각해 볼 대목이 있습니다. 다만 전략목표의 우선순위에 차이가 있더라도 공통된 전략목표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미국의 전략목적을 공유하고 지지해야 하고, 반대로 미국도 우리 전략목표를 지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강대국과 중진국간의 시각차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공통의 이익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동맹국간에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미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교수〓한반도에서 양국간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는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국을 햇볕정책의 입장에서나 혹은 ‘북한의 위협이 적다 크다’라는 식의 논리로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목적에도 맞는다는 점을 설득해야 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그동안 우리가 지나치게 북한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어왔기 때문에 미국 쪽과의 의사소통이 공동이익이나 신뢰에 기초해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보완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안 박사〓세계가 변하고 미국 정책도 변했는데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대응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또 국내정치적 시각에서 ‘세몰이’식의 언론플레이로 미국을 비판한다든지, 과거 미국 정책을 들춰내는 것은 한미관계 회복에도 도움이 안됩니다. 국익이 걸린 문제를 정치쟁점화한다면 그것은 자칫 우리가 추구하는 국익에 손상이 올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정부당국자가 정책설명과 대국민홍보를 할 때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을 통해 정리된 입장을 국민이나 언론에 설명해야지 중구난방식으로 발표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한 교수〓우리 정부는 어떤 회담이 있은 뒤에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우리 시각으로 설득시켰다’는 식으로 사실보다 좀 더 낙관적으로 보는 거죠. 관료체제 때문인지, 아니면 미국과 협의하는 사람들의 자존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국가적 일인 만큼 매사를 객관화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 박사〓우리가 미국을 좌지우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정책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필요합니다. 경제정책은 정부가 실책해도 시장이 보완할 수 있지만 외교안보 분야는 정부가 실수하면 민간기구가 보완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교수〓북한의 미사일 문제는 클린턴 정부 시절엔 협상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중단요구의 대상이 됐습니다. 북한이 미사일을 수출하고 있다면 미국으로서는 그것을 근절시키는 것이 필수조건입니다. 이는 개입(engagement) 정책의 필수요건이 될 겁니다. 만약 북한이 계속 미사일을 수출한다면 한반도 위기상황도 초래될 수 있습니다.

▽안 박사〓북-미 관계의 전개는 순전히 북한의 반응에 달려 있습니다. 북한이 미국의 요구에 긍정적으로 나온다면 협상이 재개돼 해결책 모색이 가능하리라 봅니다만 과거 전례를 검토해 보면 북-미 갈등은 장기화되지 않겠느냐는 게 제 걱정입니다. 북한은 적어도 클린턴 정부 수준의 관계개선 의지가 없으면 대화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협상 그 자체를 중시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다릅니다. 하나의 변수가 있다면 미중 관계가 반테러전쟁 이후 상당히 개선됐다는 점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중국 방문 때 미사일문제를 협의한다면 중국이 나름의 조용한 외교로 영향력을 확산시켜 한반도의 위기를 막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교수〓북한은 어떤 면에서 오히려 우리보다 미국의 결의나 전략적 전환을 더 잘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극도로 자극하는 행위는 피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미국과의 이해와 신뢰를 회복하면 지금의 난국을 잘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안 박사〓그래서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간에 공통된 목소리를 재확인하는 게 중요합니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를 방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는 것과 함께 한반도에서의 긴장고조는 어떤 형태든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을 한미간에 재확인해야 합니다. 다만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번에는 한미안보공약을 재확인하고 두 국민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등 좀 더 미래지향적인 면에 치중해야 할 것입니다.

▽한 교수〓부시 대통령이 아시아를 방문하는 주요 목적은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시 대통령이 한반도문제 논의만을 위해 한국에 온다는 아전인수적인 생각에서 일단 벗어나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한국에 오면 햇볕정책에 지지를 표시하고 북-미 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힐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미국에 졸라댈 필요는 없습니다. 남북한과 미국간의 3자회담을 제안하거나 한국이 북-미간 중재자 역을 자청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안 박사〓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견해가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북한이 세계상황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남북대화를 재개해 그동안의 약속사항을 이행하는 등 한반도 긴장완화에 성의를 보인다면 북-미 대화 성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모두 북한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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