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관 단지 지하에 도청용 비밀 터널을 뚫어놓았다는 보도가 나온 뒤 미국과 러시아가 냉전 시대부터 수십년간 상대국 대사관을 상대로 펼쳐온 불꽃튀는 ‘도청 전쟁’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미 연방수사국(FBI)과 국가안보국(NSA)이 수억달러를 투입해 벌여온 것으로 알려진 비밀 땅굴작전은 워낙 예민한 극비사안이다 보니 백악관이나 FBI는 논평조차 거부하고 있다.
딕 체니 부통령도 4일 터널의 존재 여부에 대한 언급을 거부했다.
수도 워싱턴의 위스콘신가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 단지가 구소련 시절인 70년대에 착공됐음에도 불구하고 90년대 들어 입주를 완료한 것도 도청분쟁 때문.
80년대 중반 미국과 구 소련은 모스크바 주재 미 대사관과 워싱턴 주재 구 소련 대사관에 대한 상대국의 도청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첨예한 신경전을 벌였다.
당시 미 의회는 고지대에 위치한 구 소련 대사관 단지 내 고층 아파트가 미 행정부 청사에 대한 도청 장소로 이용될 수 있다며 건물 일부의 사용에 제동을 걸었다.
반대로 미국은 85년 모스크바 주재 미 대사관 신축과정에서 구 소련 인부들이 건물 벽에 도청장치를 했다며 신축을 한때 중단하기도 했다.
이때 미 정부는 신축 건물을 완전 철거하는 방안까지 고려하다 상층부 2개층을 헐어낸 뒤 미 본토에서 신원이 확실한 인부들을 데려가 2개층을 다시 올리고 입주를 마쳤다.
워싱턴의 현 러시아 대사관 신축 당시 FBI는 구 소련이 고용한 하청업체 직원으로 첩보요원들을 위장 잠입시켜 활동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도청을 위해 비밀 터널을 뚫은 것은 러시아 대사관이 처음은 아니다. 50년대에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동독의 동베를린 지하로 땅굴을 뚫어 구 소련과 관련된 전화선을 통해 감청하다 영국의 이중스파이 때문에 들통났었다.
또 80년대 초엔 ‘TAW’라는 암호명의 미 CIA 요원이 수년간 모스크바 내의 전화선을 통해 도청하다 역시 이중 간첩의 배신으로 발각된 일이 있다.
<이종훈기자>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