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대담]김학준 고문- 왈저 교수 대담

  • 입력 2001년 1월 1일 14시 29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디지털 기술의 확산으로 지구촌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변화를 겪고 있다. 세계 지식사회를 선도하는 석학과의 대담을 통해 21세기 세계의 변화와 인류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면서 한국인이 가야 할 길을 짚어 본다>>

대담일시: 2000년 12월 20일

대담장소: 미국 프린스턴시 고등연구원 왈저교수 연구실

▽김학준 고문〓교수님은 미국과 유럽의 사상계에는 1970년대 후반 이후 널리 알려지면서 일정한 지지 기반을 확보해왔습니다만, 우리나라에는 최근 몇 해 사이에, 그것도 제한된 철학자들과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졌을 뿐입니다. 교수님의 연구영역은 참으로 넓은데 각개의 영역에서 세계적으로 높은 학문적 수준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면 관습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과학적 의미에서 21세기의 첫 해에 해당되는 2001년 새 해를 맞이하면서 “새 세기는 문명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인류는 어떤 과제들을 안게 됐는가”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새해 석학 대담
- 美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
- 美 동아시아 전문가 제럴드 커티스
- 美 한반도 전문가 김영진 교수에 듣는다
- 美 철학자 리처드 로티 교수
- 佛 피에르 레비교수-김동윤교수

▽왈저 교수〓저는 유대인으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본능적인 증오심을 가진 채 성장했으며 이 과정에서 국가에 의한 폭력,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약이나 침해, 인종적 편견, 신앙 및 이념에서의 독선, 우세한 쪽의 열세한 쪽에 대한 억압과 착취, 침략적 전쟁과 정복 등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게 됐습니다. 파시즘, 국수주의, 인종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 등에 반대하는 입장에 일찍부터 서게 됐고, 좌파적 시각을 지니게 됐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는 소비에트식 마르크시즘, 곧 볼셰비즘에 대해서도 철저히 반대한다는 사실입니다.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비판했습니다. 좌파의 독재이건 우파의 독재이건,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복지, 사회적 평화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므로 어떠한 여건과 명분 아래서도 결코 수용될 수 없습니다.

새 세기, 새 천년대라고 해도 이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인류는 어떠한 형태의 독재이건 반드시 거기에 맞서 투쟁해야 합니다. 반면에 차이(差異)에 대한 상호인정, 관용, 다원주의, 평등, 평화 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됐습니다.

▽김학준 고문〓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려 온, 그래서 이제 평화를 이룩하고자 힘쓰고 있는 한반도 상황을 염두에 둘 때, 교수님의 저서들 가운데 우선 전쟁에 관한 것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특히 1977년에 출판한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은 아마도 이 주제에 관한 한 20세기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될 것입니다.

▽왈저 교수〓생명과 자유에 관한 인권은 보편적이고 기초적인 도덕이란 관점에서 이 책을 썼는데,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비폭력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침략자들에 대해 비전투원들이, 또는 시민들이 불복종, 비협력, 배척, 불매운동, 총파업 등의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침략전을 정치투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침략당한 나라에 유리한 국면을 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비폭력적 방어라고 부릅니다. 전쟁에서 어느 누구보다 비전투원, 곧 시민의 생명은 반드시 존중돼야 합니다.

1950년의 한국전쟁은 분명히 북한군의 대규모 남침에 의해 시작됐으며 이것을 막기 위해 미군이 유엔의 깃발 아래 개입한 것은 정당했습니다. 그러나 미군 개입 직후에 일어난 노근리 사건은 ‘비전투원의 면책’을 무시한 채 비전투원에 대해 미군이 저지른 참극으로 진상이 정확히 조사돼야 하겠고 그 결과에 따라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배상 또는 보상, 그리고 미국정부의 사과가 따라야 하겠습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지휘관들을 시간이 반세기나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들의 행위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에 러시아와 체첸사이의 전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지난해의 경우 러시아의 체첸에 대한 전쟁은 러시아군이 처음부터 보여준 체첸사람 전체에 대한 야만성으로 말미암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김학준 고문〓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사이에 국가사회주의 또는 현실사회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붕괴하면서 냉전이 끝나자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세계무역기구(WTO)를 출범시키고 세계를 세계자본주의 아래 통합시키려고 시도해왔습니다. 이 흐름이나현상을 글로벌라이제이션, 즉 세계화라고 부릅니다. 세계화에 대한 평가를 듣고자 합니다.

▽왈저 교수〓세계화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안고 있습니다. 매우 빠른 경제성장, 경기상승, 자본과 상품과 노동 및 기술의 자유로운 이동 등은 긍정적 측면입니다. 또 세계화를 통해 자유민주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확대됨으로써 세계시민사회가 등장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현실도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특히 투기자본의 변덕스러운 이동, 경기하강, 빈부격차의 확대, 국제적 불평등의 심화 등 부정적 측면을 가져온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로 미국 월가(街)에 자리잡은 전지구적 기업들이 전세계에 대해 패권을 행사하게 됐으며, 이에 따라 많은 나라들에서 환경적 기준, 노동과 인권, 민주주의 등에 대해 위협이 가해지게 된 것이 큰 문제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과 관련해 지적하고 싶은 사례가 오스트리아에서 극우파시스트적 외르크 하이더가 이끈 자유당이 원내 1당으로 성장한 것, 독일에서 신(新)나치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 등입니다.

한국이 1997년에 외환위기를 겪게 됨으로써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던 배경에는 바로 세계화의 부정적 요소들이 깔려 있었습니다. 한국 경제는 세계화의 덫에 걸렸던 셈이지요. 그런데 그때 IMF의 처방은 한국에 대해 불필요할 정도로 너무 가혹했고 너무 경직됐습니다.

세계화가 미국 주도 아래 전개되다보니 세계화에 희생된 많은 가난한 나라들의 미국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국제관계를 갈등과 긴장으로 바꿔놓고 있습니다.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했으며 세계 유일의 패권국가라는 지나친 자부심 또는 오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김학준 고문〓신자유주의 또는 세계화가 낳고 있는 문제점들을 교정하기 위해 유럽에서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찾고자 하는 시도가 알어나 국제적 관심을 모았습니다. 교수님은 다원적 공동체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왈저 교수〓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등이 내건 ‘제3의 길’은 해답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세계경제에서의 경쟁성을 획득하기 위해 대중의 복지를 축소하자는 제안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원적 공동체주의를 옹호하고 있는데, 이것으로써 자유주의나 개인주의를 대체하자는 것은 아니고 보완하자는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서로 조화되는 진정하고도 완전한 복지국가의 실현에 역점을 두자는 뜻입니다. 이것은 ‘승리한 쪽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시장(市場)의 지배’ 논리에 대한 반론이기도 합니다.

저의 철학은 결국 “모든 국가는 원리적으로 복지국가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됩니다.

종합적으로 말해,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 또는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지향해야 할 가치와 목표는 네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평화, 분배정의의 실현을 통한 복지, 문화적 다원주의, 개인적 자유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국가 또는 정부를 평가할 때, 이 네 개의 범주에 맞춰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거꾸로 이 네 개의 기준을 가장 잘 만족시킬 수 있는 이상적 국가나 정부는 어떤 형태를 지니는 것인지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과제는 빈곤의 완화 또는 궁극적 해결입니다. 세계화의 큰 흐름 속에서 빈부격차가 더욱 확대되는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는 오늘날, 국가나 정부는 그 문제에 더욱 예민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평등’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실현시키고 조화시킬 수 있는 ‘복합평등’에 접근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정의는 실현될 것입니다.

한국은 높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진전이라는 커다란 성취를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그 바탕 위에서 ‘복합평등’의 정의로운 사회, 다원적인 민주사회를 실현시키게 되기 바랍니다.

▼마이클 왈저는 누구▼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 교수는 20세기 후반 이후 서방세계에서 반(反)소비에트적 입장을 기반으로 진보주의적 사상을 이끌어온 미국의 대표적 정치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미국 고등연구원(Institute of Advanced Study) 사회과학부 종신교수로 재직하면서 66세를 맞이한 오늘날까지 정력적으로 글을 써왔다. 고등연구원은 프린스턴대가 있는 프린스턴시에 있을 뿐 프린스턴대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연구기관이다. 세계적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강대국들의 흥망’을 쓴 폴 케네디, 소련대사를 역임한 미국의 전설적 외교사상가 조지 케넌 등이 이곳에서 연구했다.

현재 수학부 자연과학부 역사학부 사회과학부 등 네 학부에서 25명의 세계적 석학들이 교수직을 맡고 있다. 이들은 교수라고 불리긴 하지만 고등연구원은 학생을 뽑지 않는 순수한 연구기관이기에 가르치는 일 없이 연구에 몰두한다.

△1961년 미국 브랜다이스대와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거쳐 미국 하버드대에서 정치학박사

△1962∼1980년 프린스턴대 교수, 하버드대 교수, 스탠퍼드대 연구원, 이스라엘 헤브루대 교수

△1980년 이후 고등연구원 종신교수, 비판적 계간지 ‘이견(Dissent)’ 편집위원

△‘의무:불복종과 전쟁 및 시민권’ ‘정의와 다원적 평등’ ‘정의의 영역들’ ‘시민사회와 미국의 민주주의’ ‘다원주의와 민주주의’ ‘이성 정치 정열’ 등 19권의 책을 썼음. 모두 17개국어로 번역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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