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모리 벼랑끝 위기…'野의원 매수 비디오' 정국 강타

  • 입력 2000년 9월 17일 19시 02분


‘사무라이’, ‘천부적인 승부사’ 등으로 불리며 지난 10년간 페루를 철권통치해 온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의 정치생명이 사실상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의 오른팔인 국가정보부(NIS) 부장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가 야당의원을 매수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가 15일 공개되면서 페루국민의 하야요구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기 때문.

문제의 테이프 공개이후 후지모리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반정부시위가 페루전역을 뒤덮자 결국 후지모리 대통령은 16일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 의회해산과 헌법개정 등의 과정에서 정치공작을 수행하며 자신의 독재정치를 지탱해온 NIS도 해체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선거일정 및 자신의 퇴임 시기와 관련해 ‘가까운 미래’라고만 언급함으로써 마지막 출구를 열어둔 상태다. 야당의원들은 “총선 일정이 명시되지 않았다”고 강하게 반발하며 후지모리가 약속을 지킬지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그는 6월 대통령에 당선, 3선 연임을 이뤘으나 이를 ‘페루 민주주의 쿠데타’로 규정해 저항하는 다수의 국민으로부터 끊임없이 퇴임압력을 받아왔다. 미국과 이웃 남미 국가들로부터도 외면당하면서 후지모리의 페루 정부는 점차 정치적으로 고립의 길을 걸어왔다. 국내외로부터 사임압력을 받는 상황에서 발생한 이번 야당의원의 매수사건은 15일 이후 페루내 반정부시위를 격화시키면서 후지모리 대통령으로 하여금 10년 동안의 철권통치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태판단에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90년 집권 이후 불도저식 경제개발과 철저한 야당탄압을 앞세운 그의 철권통치를 상기할 때 이번 하야 시사는 그가 직면한 사태의 심각성을 반영하고 있다.

후지모리 대통령의 재선거 실시 공언에 대해 지난 대선 그와 경쟁한 야당지도자 알레한드로 톨레도는 그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면서 독립적인 저명인사들이 주도하는 과도정부를 구성해 1년 안에 총선을 실시하자고 요구했다.

야당과 가톨릭 주교단도 그의 즉각적인 사임을 요구하고 나서 페루정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여기에다 리마 주변에는 벌써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후지모리 대통령이 군부에 의해 인근 해군기지에 연금됐다는 루머마저 돌고 있어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지난달 △야당인사 총리 임명 △NIS 체제개편 △야당과의 민주화 일정 합의 등 잇따른 민주화 약속으로 반정부 여론을 어느 정도 무마하는 데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동안 선거부정을 둘러싼 야당과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을 곡예하듯 피해나갔던 후지모리 대통령은 야당 도덕회복전선(FIM)의 제보로 15일 전파를 탄 58분짜리 비디오테이프에 마침내 덜미를 잡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90년 집권이후 좌익 게릴라 진압과 개발독재를 내세우며 ‘페루판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주장한 후지모리 대통령은 3선 연임에 성공한 지 불과 3개월만에 대통령직을 떠나야하는 기로에 서게 됐다.

<박제균·백경학기자>phark@donga.com

▼비디오테이프 대화록 요지▼

15일 페루 현지 방송에 공개된 한 편의 비디오테이프에 페루 국민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국가정보부장이 집무실에서 알베르토 쿠오리 의원을 매수, ‘야당의원 빼가기’를 하는 장면이 생생히 담겨 있었기 때문. 다음은 테이프에 나타난 대화록 요지.

▽쿠오리〓문서에 사인해야 된다면 사인도 하고 날짜도 넣고 싶은데…. 비밀보장을 요청한다.

▽몬테시노스〓문서에는 날짜가 없다.

▽쿠오리〓문서에 내가 ‘10월1일’이라고 날짜를 써 넣겠다.

▽몬테시노스〓10월은 안된다. 8월에 (집권당이) 의회의 의석을 장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쿠오리〓8월에 갑자기 (야당인 ‘페루의 가능성’에서 ‘페루 2000’으로) 당적을 바꾼다…? 글쎄, 생각할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

▽몬테시노스〓여론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한 ‘타이밍’인가? 나로서는 더 이상 (야당에) 머물지 말고 우리와 함께 행동하자고 말하고 싶은데….

▽쿠오리〓나 쿠오리는 뛰어난 양식과 감각을 지닌 사람은 아니지만 소신 있는 야당의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평범한 시민이나 ‘얼마간의 인센티브’로 이미 당적을 옮긴 다른 의원들과 같은 급으로 평가받고 싶지는 않다.

▽몬테시노스〓좋다. 그러면 10월로 하자. 탈당은 분명히 하는 건가.

▽쿠오리〓‘초청’이 있어야 할 텐데….

▽몬테시노스〓그러면 하나 만들자. “존경하는 아무개씨, XX씨가 보낸 초청에 응해주셔서 어쩌구 저쩌구….” 이렇게 하면 되지 않겠나?

▽쿠오리〓금전문제, 그것도 좀 가능하도록 해보자.

▽몬테시노스〓얼마면 되겠는가. (왼쪽 바지 주머니에서 달러 뭉치를 꺼내며) 여기 10(미화 1만달러를 의미)이 있다.

▽쿠오리〓이 정도 말고, 15나 20 정도는 돼야지.

▽몬테시노스〓좋다. (다시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돈다발을 꺼내며) 10 더하기 5는 15.

▽쿠오리〓내 선거운동에 들어간 비용을 회수할 방법이 없겠는가.

▽몬테시노스〓말씀만 하라. 지금까지 얼마나 지출했는가?

▽쿠오리〓2만2000달러를 (당에다) 주고 또 개인적으로 2만달러 가량을 더 썼으니까….

▽몬테시노스〓4만∼5만달러는 되겠군. 많이도 썼군. 그렇지 않은가?

▽쿠오리〓투자라고 봐야지요. 당내에서 (탈당을 원하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와 연결시켜주면 고맙겠다.

<박제균기자>phar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