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버항 참사는 '유러피안 드림' 비극"

  • 입력 2000년 6월 20일 20시 02분


《찬찬히 들여다보면 유럽은 희망의 땅이 아니다. ‘인권 선진국’이란 아름다운 자랑 뒤에는 인간답게 살겠다는 꿈 때문에 무작정 유럽에 들어갔다가 무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수많은 제3세계인의 슬픈 사연이 숨어 있다. 58명의 중국인 밀입국자가 트럭을 타고 가다 질식사한 ‘도버항 참사’를 계기로 유럽 대륙에서 빚어지고 있는 ‘못 가진 자들’의 처절한 불행을 재조명해본다.》

영국 도버항에서 동양계 밀입국자 58명이 밀폐된 트럭 적재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과 관련, 영국 수사당국은 19일 본격 수사에 착수하고 밀입국 및 인신매매에 연루된 국제범죄조직들을 대대적으로 단속하기로 했다.

경찰은 18일 문제의 15m짜리 흰색 메르세데스 벤츠 트럭을 운전했던 네덜란드인 운전사를 체포해 조사중이다. 영국관리들은 밀입국을 시도하다 숨진 희생자들이 모두 동양계이며 중국인으로 추정된다는 사실밖에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홍콩 일간지 명보 등 홍콩 신문과 방송들은 19일 “중국인 밀입국자 58명이 숨지고 2명이 생존해 치료받고 있다”며 “이들이 섭씨 30도가 넘는 고온에서 밀폐된 트럭 적재함 안에 숨어 있다 질식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적재함 입구쪽에 있다 목숨을 건진 2명의 생존자는 밀입국 알선조직에 의해 납치되거나 살해당할 가능성을 우려, 영국 내 비밀 장소로 옮겨졌다.

잭 스트로 영국 내무장관은 의회에서 “이번 사건으로 숨진 남자 54명과 여자 4명은 밀입국으로 거액을 벌어들이는 범죄조직의 희생자들”이라고 말했다.포르투갈에서 열리고 있는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 참석한 EU 지도자들도 성명을 내고 “유럽경찰기구(유로폴)와 공조해 밀입국 및 인신매매 관련 범죄조직을 적발, 소탕하고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제균기자>phark@donga.com

▼유럽 불법이민자 골머리▼

영국 도버항 참사로 불거진 불법이민 문제(밀입국자 포함)는 이미 유럽에서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국제이주기구(OIM)는 최근 유럽 전체의 불법이민자 수가 300만명 가량이며 매년 30만∼50만명이 새로 유럽에 들어오고 있다고 추산했다. 사고가 발생한 영국에서는 98년 한 해에만 1만6470명의 불법이민자가 적발됐다.

불법이민자들은 아시아 중동으로부터 더 나은 삶을 찾아오는 ‘생계형’과 내전에 시달리는 보스니아 코소보 등 중 동유럽에서 탈출한 ‘안전형’ 난민이 주류. 이들이 ‘유러피안 드림’을 꿈꾸는 나라는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서유럽 국가들.

이들은 국제범죄조직과 연루된 불법이민 송출조직에 수천에서 수만달러의 거액을 주고 배의 화물칸, 냉장 트럭 등에 숨어 들어가다 변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지난달 4일에도 이탈리아에서 13명의 밀입국자가 타고 있던 보트가 경찰 경비정과 충돌해 모두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에는 아드리아해에서 밀입국자들이 타고 있던 보트가 침몰해 무려 170여명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대형참사가 빚어졌다.

가까스로 밀입국에 성공한다 해도 불안한 신분 때문에 ‘현대판 노예’로 전락하거나 범죄조직에 연루되기 일쑤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지는 19일 아스다 세인즈버리 등 대형 슈퍼체인들이 불법이민자들을 고용해 착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부분 동유럽 출신인 불법이민자들은 고수입 직장을 보장한다는 광고에 속아 브로커에게 1000파운드(약 170만원) 가량의 알선료까지 낸 뒤 밀입국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또한 유럽에 밀입국한 중국인들은 중국인 갱 조직인 트라이어드(三合會)에 가입하도록 협박받고 있다는 것.불법이민 문제로 골치를 앓는 유럽 각국은 점점 ‘문턱’을 높이고 있다. 영국 정부는 올 들어 난민신청 심사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신속 출국 절차를 도입했다.그러나 문턱이 높아질수록 불법이민자들은 더욱 필사적인 방법을 동원해 기를 쓰고 유럽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고 있다. 영국 난민위원회 닉 하드윅 회장은 “이번 도버항 참사에서 보듯 합법적으로 영국에 입국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방법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박제균기자>phark@donga.com

▼중동부 유럽 인신매매 극성▼

중동부 유럽 출신 여성들이 국제적인 인신매매 집단을 통해 매년 20만명 이상 서유럽 등의 홍등가로 팔려나가고 있다고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19일 밝혔다.

피노 아를라치 OSCE 사무차장은 이날 빈에서 열린 OSCE 회원국 회의에서 이같이 밝히며 인신매매의 근원지가 과거 아시아 아프리카 카리브지역에서 이제는 동유럽과 구소련권으로 급속히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중동부 유럽에서 인신매매된 여성들은 불법 이민조직망을 통해 54개 OSCE 정회원국 대부분의 수도와 대도시 홍등가 등지로 팔려간다. 영국 런던의 경우 연간 1000명 이상의 동유럽 출신 매춘여성들이 들어와 여권 등을 뺏긴 채 사실상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고 최근 일간 가디언지가 영국 내무부 조사결과를 인용해 보도했다. 영국 경찰은 런던 웨스트엔드 소호지역의 윤락여성 가운데 4분의 3이 외국에서 온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분쟁지역도 동유럽 출신 여성들의 수요처다. 게르하르트 슈토트만 OSCE 민주인권사무소장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과 유엔 요원 및 각종 비정부기구(NGO) 요원 등이 파견된 유고연방 코소보에 최근 팔려온 동유럽 출신 여성들이 넘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개탄할 것은 코소보 자체에서도 여성 인신매매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애니타 보티 미국 백악관 여성문제 자문담당관은 동유럽 여성들이 1만5000∼3만달러(약 1650만∼3300만원)에 팔리고 있으며 일단 인신매매조직에 걸려들면 엄청난 빚을 진 채 매춘과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슈토트만 소장은 “인신매매를 징벌하는 제대로 된 국제규정이 없어 범죄조직과 악덕업자들에게는 인신매매가 마약거래보다 안전하고 처벌도 미약한 ‘탁월한 사업’이 돼왔다”며 “인신매매가 마약 못지않게 어려운 사업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도 8일 유엔특별총회인 ‘여성 2000 회의’에 참석해 “인신매매가 점차 국제화 기업화되고 있다”며 “이를 근절하려면 180여 유엔 가입국이 관련 정보를 교환, 인신매매조직 척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권기태기자>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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