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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4월 19일 19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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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그라드 최고의 일간지 드네브니 텔레그래프, 주간지 에브로플리야닌의 소유주 겸 편집국장이었던 쿠루비야는 한때 세르비아 비밀경찰의 정보분석가로 일했다. 그때는 밀로셰비치와도 친했다.
그러나 그는 밀로셰비치의 독재와 횡포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밀로셰비치를 잇따라 비판했다. 밀로셰비치는 그를 증오했다. 특히 98년10월19일자 텔레그래프에 그가 쓴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은 결정적이었다.
신문은 바로 정간됐다. 그는 발행지를 몬테네그로로 옮겨 정론직필을 계속했다.
그러던 11일 베오그라드에서 부인과 집을 나서다 괴한 2명으로부터 11발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세르비아 신문들은 그의 피살을 단 세 줄로 보도했다. 며칠후 장례식에는 비밀경찰의 삼엄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시민 2천여명이 몰려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쿠루비야가 목숨과 바꿨던 글이 18일 영국 선데이타임스지에 소개됐다. 너무도 용기있는 그의 글을 타임스는 ‘스스로에 대한 사형판결문’이라고 평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하, 당신의 참모들과 연립여당은 지난주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세르비아를 초법적 비상사태로 몰아넣었습니다.
세르비아인들은 이제 듣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3개 일간지와 한 방송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세르비아 역사상 한번도 없던 일로 이는 세르비아의 수치입니다.
이보다 더 한 일이 곧 시민들에게 닥치겠지요. 공식적으로 비상사태가 선포된 적이 없었지만 이미 계엄통치가 시작됐습니다. 어쩌면 각하도 모르게 이뤄진 일들인지 모릅니다.
각하가 집권 10년의 결과를 냉철히 따져보는 것을 거부한 탓일까요. 아니면 당신이 집권했을 때 대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보냈던 지지와 성원이 이제 사라진 탓일까요. 정치적 술수로 가득찬 마술상자가 이제 텅 빈 것인가요.
금세기 들어 세르비아인이 쌓아온 모든 것이 무참히 파괴됐습니다. 연방과 국가의 경계,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며 획득했던 동맹국의 지위, 민족의 존엄성, 유럽과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남겨진 동포….
이제 우리나라는 유럽공산주의의 최후의 찌꺼기이자 학살자가 돼가고 있습니다.
세르비아의 여러 제도는 장점과 가치를 철저히 잃었습니다. 대학은 집단농장과 다름없게 됐고 사회과학 아카데미는 유아원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신은 교회와 의회, 언론과 정당, 정부를 모욕했습니다. 중산층을 빈곤하게 만들고 한 떼의 특권층을 살찌웠습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천4백달러로 떨어졌습니다. 당신이 곧 망할 것이라던 슬로베니아는 9천5백달러로, 크로아티아도 4천6백달러로 늘었습니다.
연금생활자들은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 더미를 뒤집니다. 연금공단기금이 바닥나 연금을 못 받은 지 예닐곱달이 지났습니다. 국가는 엉터리 금융체계와 외환구조를 이용해 20억달러를 국민으로부터 수탈했습니다. 실업자는 2백만명입니다. 10만명의 고급인력이 해외로 떠났습니다. 곧 닥칠 전쟁과 징병을 피하기 위해, 또는 이 땅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어서입니다. 남은 것은 당신이 밀어주는 1백여 가문, 그리고 굶주림과 비참 위에 군림하는 공무원들뿐.
대기업은 당신의 졸개들이 운영합니다.
세르비아인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약이 없고 의료체계는 거의 붕괴됐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이 비타민을 찾듯 사람들은 진정제를 찾습니다. 갱단이 생필품공급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폭력과 살인이 매일 일어나지만 국가는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켜야할 책임을 저버린 지 오래입니다.
당신은 모든 공무원을 당신의 은총만 기다리는, 반대세력을 쳐부수는 공모자로 만들었습니다. 가장 무능한 자가 출세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비상사태상황은 사회에도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누구든지 처형하는 경찰과 그 끄나풀들은 공포를 만들었습니다. 절대복종만이 요구됩니다. 꼭두각시같은 지지만이 춤추고 있습니다.
각하. 당신의 나라, 당신의 국민은 수년 동안 죽음과 비참함, 테러와 실망, 공포와 공황 속에 살고 있습니다. 굶주림과 비굴함은 국민들이 말로 항의할 힘조차 앗아갔습니다.
이 편지는 공포와 맞서 싸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조헌주기자〉hans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