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정부가 이제야 여러분에게 돌아왔습니다』
대통령이 된지 불과 3일. 바츨라프 하벨대통령은 90년1월1일 정오 전국에 중계된 TV와 라디오를 통해 신년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귀를 기울이던 1천여만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은 눈물을 흘리며 함성으로 환호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얼마나 바랐던 정부였던가.
프라하 시민들은 아침부터 역사의 현장인 바츨라프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하벨대통령의 신년사가 끝나자 시민들은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중 「환희의 송가」를 소리높여 불렀다. 피한방울 흘리지 않았던 「비단혁명」이 끝난지 불과 6주만이었다. 감격과 흥분은 아직도 넘쳐나고 있었다. 공산당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실체는 아직도 엄청났다. 사회는 불안했다.
하벨은 무엇보다 공산독재 40년의 「슬픈 유산」을 순조롭게 청산하고 국가의 장래를 설정해야 하는 사명감을 거듭 다짐했다. 그는 국민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자신을 속이지 말자』고. 말하는 것과 생각을 달리하는데 익숙해야만 했던 도덕적 타락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자고 호소했다. 하벨은 공산치하를 「강요된 무관심과 가면의 사회, 괴기하고 덜커덕거리며 냄새나는 기계 톱니바퀴의 사회」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민주국가의 건설에 자신감을 가지자』고 부탁했다. 당면한 최대의 적은 『우리 자신의 나쁜 자질, 즉 공공의 일에 무관심하고 독단적이고 이기적이며 개인의 영달만 추구하고 서로 적대하는 것』이라며 민주사회의 시민이 되어줄 것을 요망했다.
77년1월에 발표된 유명한 「77헌장」을 초안했던 하벨은 당시 헌장에 담았던 인본주의적이고 민주적 전통을 가진 도덕사회의 건설이 꿈이었다. 사랑 진실 자유 도덕이란 단어들을 하벨은 깊이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려 노력했다. 이는 하벨이 지금까지 추구하고 있는 일관된 신념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을 좋아했다. 그러면서 젊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격정의 부작용을 우려했다. 그래서 수시로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젊은이와 만나면 늘 「시민적 용기와 통찰력을 갖는 지성적인 젊은이」를 강조했다.
하벨대통령에게 최대의 위기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였다. 91년3월부터 일기 시작한 슬로바키아민족의 분리독립운동은 갈수록 열기를 더해 시위에다 폭력성까지 가세했다. 하벨은 직접 브라티슬라바를 방문했다. 배신자라는 야유가 쏟아졌고 과격세력은 대통령을 밀치고 경호원들을 폭행했다.
하벨은 『진실로 독립을 원할 경우 대통령으로서 이를 막을 권리는 없다. 연방국가보다 각기 독립하는게 좋다』고 말했다. 다만 민족적 반목을 가지지 말고 평화적으로 분리하는데 혼신을 쏟았다. 하벨은 연방이 두동강난데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체코국민은 그 책임이 하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며 다시 대통령직을 맡아줄 것을 탄원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93년1월 하벨은 체코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재선출됐다.
체코는 내각책임제다. 대통령은 하원에서 선출되는 5년 임기의 상징적 국가원수이다. 그러나 하벨대통령은 국민의 지지와 국제적 인지도를 바탕으로 국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방법은 「말」(연설)이다. 체코인들은 이를 하벨대통령의 전공이라 부른다. 그는 말을 통해 인간존중 도덕성 등의 가치관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말은 때로 어둠 속의 불빛이 될 수도 있으며 독 묻은 화살이 될 수도 있다』며 대단히 조심한다.
하벨은 건강을 잃기 전에는 매주 일요일 라디오 체코를 통해 국내외 정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여론을 청취해 왔다.
그는 올 신년사에서도 『정치인은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인류애를 중시해야 한다. 이를 잠시라도 잊으면 국가와 국민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벨은 공산정권이 무너졌을 때 국민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국민에게 봉사하고, 또 국민이 나라에 봉사하고 싶어할 만한 그런 「국민의 공화국」을 만들겠다』고. 이제 체코는 그런 나라가 됐다.
〈본〓김상철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