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윈난성내 다이족 자치주인 시샹반나. 여기 한 귀퉁이에 콩거족이 모여 산다. 시샹반나의 중심도시는 징흥. 「봄의 도시」 쿤밍에서 4백25㎞ 거리에 있다. 항공기로 50분, 승합차로는 24시간 이상 걸린다. 중국인 한달 급료(평균 4백元)보다 많은 4백50元을 내고 항공기로 날아갔다. 어렵게 어렵게 도착한 징흥. 공항 청사밖에서 원색의 전통의상을 차려 입은 다이족 젊은이들이 봄바람처럼 싱그러운 미소와 춤, 흥겨운 연주로 방문객을 맞아 주었다. 보고만 있어도 반하기 쉬운 미소였다. 그러나 콩거족은 거기에 없었다.
콩거족은 중국정부도 간과하는 희귀 종족. 중국내 55개 소수민족에조차 포함되지 않을 정도다. 소외된 집단, 곧 아웃사이더인 셈이다.아마도 이들을 찾아간 한국인으로는 내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콩거족 마을은 징흥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오지에 있다. 택시를 대절해 서쪽 산길을 달려 뭉양을 지나 한다이족 마을인 난능강에 당도했다. 여기에서 산중의 콩거족 마을까지 걸어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별수없이 큰돈을 주고 경운기를 빌렸다. 한시간쯤 들어가는 험한 산길의 연속이었다.
농사철의 콩거족 마을은 조용했다. 모두 일하러 나갔기 때문이다. 산자락의 화전을 일구는 힘든 농사일 중에도 이들은 틈틈이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랫소리가 메아리쳐 산골짜기 가득 울려퍼진다.
이곳에 사는 콩거족은 통틀어 45가구에 3백여명. 여자들은 깊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남색의 전통 의상을 입고 지낸다. 그러나 남자들은 허름한 중국 인민복 차림이다. 이런 남녀간 차이는 중국내 소수민족 마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콩거족 여인들은 소녀에서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문양이 독특한 은팔찌를 몇개씩 차고 있다.
종아리에도 전깃줄 같은 끈을 감는다. 은팔찌는 팔라고 해도 팔지 않는다. 자신을 지켜주는 부적처럼, 혹은 정절의 상징처럼 한시도 몸에서 떼어 두지 않는다. 머리치장도 독특하다. 파마를 한다거나 단발머리는 여기서는 상상도 못할 일. 옛날 우리네 여인들처럼 모두 생머리로 기른다. 그렇다고 머리채를 그냥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머리카락에 가발을 넣어 머리 왼쪽 위편에 풍성하게 쪽을 찐다. 그리고 나무나 쇠막대로 고정시킨다.
2남6녀를 둔 이쭘과 아이따오 부부. 아이따오는 이쭘의 두번째 남편이다. 내가 찾아간 날 그 집안 셋째딸 이한은 몸이 아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살림살이가 무척 궁색한데다 사는 곳마저 궁벽진 곳이다 보니 병이 들면 그냥 아파야 한다. 약은 없고 그저 뜨거운 차나 마시는 게 고작이다. 이들이 마시는 차는 발효차가 아닌 녹차로 배릿한 풀맛이 일품이다.
나중에 일터에서, 놀이터에서 돌아온 식구들을 만났다. 알고보니 막내딸 이쏜(당시 7세)만 아이따오의 친자식이고 나머지 일곱은 이쭘과 전남편의 소생이었다. 뒤늦게 일곱자식을 거느린 과부와 결혼해 자기 자식이라고는 쉰둥이 하나만 두고도 잘 사는 착한 남편 아이따오.처음에는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정말 용기있는 남자로 보였다. 콩거족 여인들은 수줍은듯 다정다감한 것이 매력이다.
그러나 열한식구(외할머니 포함)중에서는 이낭(당시 16세)이 가장 발랄하고 명랑했다. 그 덕분에 나는 그녀와 간단한 언어조사를 할 수 있었다. 콩거족의 이름은 모두 돌림자다.
여자들은 「이」로, 남자들은 「아이」로 이름을 시작한다. 이것은 다이족과 같았다. 그러나 이들이 다이족의 일파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서 온 누구인가.
그걸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누구나 관심조차 없다.
연호택(관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