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유근형]“40도 폭염에 에어컨 규제?”… 佛 친환경 정책 논란

  • 동아일보

‘6월 40도’ 이른 폭염에도 에어컨 보급률 25% 불과
전자제품점선 선풍기도 품절
옛 건물과 문화재 보존 위한 규제에 좌파 사회당의 친환경 정책 겹쳐
“도시 미관보다 생명이 중요”… 에어컨 규제 해제 목소리 고조

22일 프랑스 파리 15구의 대형 전자제품점 불랑제의 여름 용품 코너가 텅 비어 있다. 폭염에 실외기 없는 간이 에어컨, 선풍기 등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면서 파리 곳곳에서 품절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22일 프랑스 파리 15구의 대형 전자제품점 불랑제의 여름 용품 코너가 텅 비어 있다. 폭염에 실외기 없는 간이 에어컨, 선풍기 등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면서 파리 곳곳에서 품절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유근형 파리 특파원
유근형 파리 특파원
《‘에어컨 규제’ 논란에 휩싸인 파리

22일(현지 시간) 낮 프랑스 파리 주거 밀집 구역인 15구의 대형 전자제품점 ‘불랑제’를 찾았다. 선풍기, 에어컨, 제습기 등 여름 전자제품을 취급하는 매장 지하 1층이 텅텅 비었다. 판매점인지, 빈 창고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최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곳곳에서 낮 기온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이른 ‘6월 폭염’이 이어지면서 냉방 관련 전자제품이 동이 난 탓이다. 18일 이 매장을 방문했을 때는 일부 선풍기가 있었지만 4일 만에 그마저도 품절됐다. 판매원 톰 마틴 씨는 “파리 어디를 가도 에어컨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최소 7월까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근의 다른 대형 전자제품점 ‘다르티’의 상황도 비슷했다. 이곳은 아예 냉방제품 코너 자체를 운영하지 않고 있었다. 선풍기를 사려고 이 매장에 들렀다는 라니아 제르미 씨는 “파리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큰 매장인데, 설마 선풍기 한 대가 없을지 몰랐다”며 혀를 찼다.

● 이른 폭염으로 ‘불타는 유럽’

프랑스를 포함해 서유럽과 남유럽을 강타한 이른 폭염은 북아프리카에서 유입된 뜨거운 공기가 강한 고기압의 영향으로 서유럽 상공에 갇혀 ‘열돔’ 현상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실제 2020년대 초만 해도 파리의 6월 평균 최고기온은 섭씨 22도 안팎으로 선선한 편이었다. 하지만 올해 6월(1∼22일) 평균 최고기온은 30도에 육박하고 있다. 특히 가장 더운 이번 주는 낮 최고기온이 40도에 육박했다.

프랑스 기상청은 22일 현재 본토 96개 광역자치권(데파르트망) 중 약 절반인 49곳에 최고 수준의 경보인 ‘폭염 적색’ 경보를 내렸다. 폭염의 영향권에 든 주민만 약 5300만 명으로 추산했다. 대서양에 접한 북서부 노르망디, 브르타뉴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폭염을 겪고 있다는 의미다. 기상청은 “이번 폭염의 강도는 역사적인 수준”이라며 “이달 말 낮 최고기온이 44도를 기록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폭염을 피하기 위해 22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생마르탱 운하를 찾은 청년들이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평소 유람선이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최근 수영이 허용돼 청년들의 피난처로 부각되고 있다. 파리=유근형 특파원 noel@donga.com
폭염을 피하기 위해 22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생마르탱 운하를 찾은 청년들이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평소 유람선이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최근 수영이 허용돼 청년들의 피난처로 부각되고 있다. 파리=유근형 특파원 noel@donga.com
습도 또한 날로 높아지고 있다. 파리에서 20년 넘게 살았다는 알렉산드리아 미리야 씨는 “과거에는 여름에도 습도가 높지 않아 에어컨 없이 지낼 만했는데, 최근에는 너무 습해서 에어컨 없이 버티기가 어렵다”고 했다.

최신식 건물이 많지 않은 파리의 주요 식당과 카페는 실내 좌석이 아닌 야외 좌석 위주로 영업을 한다. 여름에는 상점 내 창문을 활짝 열고 천장에 달린 선풍기에 의존한다. 에어컨이 있는 매장은 드물다.

폭염은 이런 영업 관행도 바꾸고 있다. 파리 16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킨 흐야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에어컨 없이 카페를 운영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최근에는 에어컨이 없는 카페에 손님이 줄고 있다는 게 확연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파리의 대중교통 중에도 에어컨이 설치돼 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더위로 인한 어려움’도 발생한다. 파리의 낮 기온이 35도에 육박했던 18일 오후 2시경 기자가 탄 42번 버스의 내부 온도는 33도를 넘어 외부와 별 차이가 없었다.


● 각종 규제로 에어컨 부족 심각

실제로 프랑스의 냉방 시설이 충분치 않다는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프랑스의 에어컨 보급률은 약 25%다. 미국(약 90%), 한국(약 86%)은 물론이고 스페인과 이탈리아(각 45%) 등보다도 훨씬 낮다.

이는 엄격한 문화재 및 도시 미관 보호 정책과도 연관이 있다. 파리 도심의 대부분 건물은 19세기 중반에 세워졌다. 당국 또한 이런 건물들을 주요 문화재나 다름없이 취급한다.

이로 인해 건물 외벽에 실외기를 설치하려면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는 물론이고 공동주택 관리조합의 승인까지 얻어야 한다. 마레 역사지구, 주요 문화재 인접 지역에서는 사실상 에어컨 실외기 설치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파리 15구에서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는 장 아그헤스 씨는 “각종 규제도 까다롭지만 오래된 건물의 가치 훼손을 우려하는 집주인들도 실외기가 있는 대형 에어컨 설치에 부정적”이라고 설명했다.

2014년 4월부터 올해 3월까지 12년간 파리를 이끈 안 이달고 전 시장의 친(親)환경 정책 또한 ‘에어컨 없는 파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도좌파 사회당 소속인 그는 탄소 배출 감축, 자전거 확대, 차량 통행 축소 등의 정책을 강조했다. 폭염 대책 또한 냉방기 확대보다 녹지 확대, 그늘 조성, 급수대 확충 등을 우선시해왔다. 학교 등 일부 공공시설에서는 아예 에어컨 설치 자체를 금했다.

에마뉘엘 그레구아르 시장 또한 사회당 소속이며 전임자와 비슷한 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에 보수 진영에서는 “사회당 소속 시장들이 폭염의 현실을 과소평가한다”고 비판한다. 특히 2024년 파리 올림픽 당시 각국 선수단이 이동하는 버스에서조차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상당수 선수들의 경기력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프랑스 파리의 한 미용실에서 사용 중인 간이 에어컨. 실외기 없이 호스로 더운 바람을 외부로 내보내는 방식이다. 에어컨 실외기 설치 규제가 강한 프랑스에서 최근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파리=유근형 특파원 noel@donga.com
프랑스 파리의 한 미용실에서 사용 중인 간이 에어컨. 실외기 없이 호스로 더운 바람을 외부로 내보내는 방식이다. 에어컨 실외기 설치 규제가 강한 프랑스에서 최근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파리=유근형 특파원 noel@donga.com
이로 인해 최근에는 ‘실외기 없는 간이 이동형 에어컨’이 주목받고 있다. 에어컨에 연결된 호스를 통해 외부로 더운 공기를 빼내는 방식이다. 각종 사무실, 식당, 부동산, 미용실 등 파리의 주요 자영업자들은 최근 너 나 할 것 없이 간이 에어컨을 쓰고 있다.

● 대선 쟁점 된 에어컨 규제

프랑스 당국은 연일 폭염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적색 경보가 발령된 파리 등의 지역 축제에서 음주 행위를 금했고 일부 도시에서는 예정된 콘서트 등도 취소시켰다. 월드컵 기간의 길거리 응원도 금지됐고 파리와 프랑스 나머지 지역을 잇는 기차 노선 71편의 운행도 하지 않고 있다. 파리의 관광 명소 에펠탑 운영 마감 시간 또한 기존의 자정경에서 매일 오후 4시까지로 대폭 앞당겼다. 파리 시내 곳곳에 1400개의 음수대도 운영하고 있다.

교육부는 22일 약 850개의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 외 1500개 학교에는 학생들의 이른 하교를 허용했다.

다만 이 정도 정책만으로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에어컨 관련 각종 규제의 해제를 외치는 시민들은 “폭염은 노약자, 중환자 등의 생명과 건강에도 직결되는 실존적 위협이며 파리의 역사적 경관을 보존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에어컨 규제 해제’ 의제가 내년 4월경 치러질 프랑스 대선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할 것이란 전망에도 최근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파리 청년문화의 메카’ 생마르탱 운하를 찾았다는 시민 라일라 미즈월렌 씨는 “폭염은 매년 수천 명을 죽이는 실존적 위협”이라며 “‘친환경’만 중시하며 무조건적인 에어컨 규제를 고수하는 세력에게는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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