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임대차 계약. 그런데 세입자가 제시된 임대료가 싼지 비싼지도 모른 채 ‘그냥 하던 대로’ 재계약하자는 임대인 얘기만 믿고 덜컥 사인한다면?
설마 내가 살 집 구할 때야 이럴 일 없겠죠. 하지만 기업이 사무실을 구할 때, 특히 해외 오피스를 계약할 땐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데요.
최근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이 급격히 늘면서 새롭게 뜨는 영역, 기업의 해외 부동산 관리에 대해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요즘 가장 뜨거운 오피스 시장은 어딘지도 알려드릴게요. 글로벌 부동산 서비스 기업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의 전혜원 글로벌코리아데스크 팀장입니다.
뉴욕 브루클린의 랜드마크인 ‘더 리파이너리 앳 도미노(The Refinery at Domino)’. 1884년 지어진 설탕 공장을 리노베이션해서 2023년 고급 오피스 빌딩으로 탈바꿈했다. 더 리파이너리 앳 도미노 공식 홈페이지
-최근 들어 한국 여러 대기업의 해외 부동산 자산 관리를 맡으셨더라고요. 대기업은 해외에 조직과 인력이 많잖아죠. 그런 큰 기업은 부동산 업무도 자체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전문업체가 필요하죠?
“물론 매우 큰 기업이고, 유능한 직원들을 뽑아 해외로 내보내고 있는데요. 문제는 주재원 임기가 보통 4년이란 점이죠. 엔지니어나 경영직 분들은 보통 부동산 업무를 해본 적도 없고요. 또 매출과 수익성 같은 본업 챙기기 바쁘다 보니, 부동산 임대차 계약을 분석할 시간도 없죠. 그래서 저희가 임대차 계약서를 들여다보면 ‘왜 이 가격에?’라고 할 때가 많아요. 시장이 고꾸라져서 임대료 시세가 하락했는데 10년, 15년째 별다른 협상 없이 계약 연장 중인 거죠. 무엇보다 4년마다 바뀌니까 인수인계도 안 되고 계약서 원본이 없는 경우도 있고요.”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의 전혜원 글로벌코리아데스크 팀장. 뉴욕에서 대학을 나온 전 팀장은 한국에서 방송 기자로 일하다 2018년 부동산 서비스 업계로 이직했다. 그는 ‘촉박한 마감에 맞춰 야마(주제)를 잡아 보고서를 작성한다’는 점에서 이 일이 기자직과 비슷한 점도 있다고 설명한다.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제공-4년 있다 떠나는 주재원이 챙기기엔 역부족이군요.
“해외사업이라는 게 지정학적 이슈에 따라 특정 지역이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하거든요. 그럼 어딘가는 추가 투자를 하고 어딘가는 비용을 줄여야 하는데, 기업 입장에서 비용 절감에 가장 효과적인 게 부동산이에요. 본사가 전 세계 부동산 정보를 투명하게 알고 있으면, 그걸 컨트롤할 수 있죠. 구글이나 MS 같은 글로벌 기업은 아예 부동산만 담당하는 전문 팀이 본사에 있거든요. 거기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데, 우리 기업들은 이제 시작 단계이죠.”
-그럼 기업의 목표는 결국 효율화이로군요.
“그래서 지금 임대차 계약서들을 하나씩 다 들여다보고 있어요. 만약 시장 평균가보다 임대료를 높게 내고 있는 경우엔 뜯어고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과거보다 임대료가 고꾸라진 지역이 있나요? 미국에도?
“미국 오피스 시장은 지금도 아직 두 자릿수대 공실률을 보이고 있어요. 신축과 프라임, A등급 빌딩 쪽으로 쏠림 현상이 나타나서요. 10년 이상 된 오피스빌딩은 평균적으로 공실률이 높죠. 그래서 투자자들이 이걸 재개발해서 호텔, 아파트, 연구개발 센터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전혜원 팀장이 맡아 신규 임대를 진행했던 쿠팡의 미국 워싱턴DC 오피스 전경.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제공
브루클린 핫플은 왜 공실일까
-최근에 미국 뉴욕에 진출한 토스증권과 키움증권의 오피스 신규 임대 프로젝트를 진행하셨는데요. 뉴욕 오피스 시장은 분위기가 어떤가요?
“뉴욕은 언제나 전 세계에서 가장 우량한 핵심 안정형 자산이죠. 특히 나스닥 IPO를 노리는 기업이라면 특히 뉴욕을 거점으로 선호하는데요. 투자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뉴욕 오피스 시장은 완전히 저점을 쳤습니다.
오피스 빌딩 가격이 가장 비쌌을 때가 코로나 직전이었어요. 코로나가 터지면서 많은 기업이 재택근무로 전환하고, 공실이 늘다 보니까 투자자들은 임대 수익률도 안 나고, 팔리지도 않아서 골치 아팠는데요. 지금도 여전히 (매매가격은) 코로나 이전 대비 거의 20% 저렴해요.
그런데 미국 동료들과 얘기해 보면 지금이 확실히 저점이고요. 조금씩 투자 기조가 회복되고 있어요. 또 연준의 금리 인하 기조까지 고려하면 내년, 내후년엔 거래가 활성화될 전망이고요. 만약 오피스 매물에 투자를 고려한다면 지금 사는 게 맞는 거죠. 다만 팔려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키움증권(왼쪽)과 토스증권(오른쪽)이 각각 임차해 쓰고 있는 뉴욕 맨해튼 오피스 빌딩의 모습. 증권사는 업무 특성상 뉴욕의 가장 중심가 오피스를 구하곤 한다.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제공-재택근무도 끝나가고 금리도 내리면서 다시 살아나는 분위기로군요.
“그런데 임대 관점에서 보자면 좀 달라요. 사실 오피스라는 게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근무한다’는 직원들의 자부심이나, 브랜드 마케팅적인 부분도 있거든요. 그런데 뉴욕은 지난 7월에도 총기사고로 블랙스톤의 유명한 임원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보안이 중요해서요. 보안이 잘 된 신축의 좋은 오피스 자산과 그렇지 않은 자산의 선호도 차이가 커요. B, C등급 자산은 여전히 임대가 잘 안되죠.
오피스 자산의 양극화가 분명한데요. 뉴욕 안에서도 주요 대기업과 금융사가 밀집한 미드타운은 거래가 아주 잘 되고요. 그보다 아래쪽에 있는 오피스 자산은 좀 힘들죠. 브루클린에선 오래된 ‘도미노 설탕정제 공장’을 고급 오피스로 만든 게 상당히 주목받고 화제가 됐는데요. 지금은 그걸 보유한 개발사가 임대가 잘 안돼서 힘들어하고 있다고 해요.”
-도심 한복판이 아니어서 그럴까요?
“교통 접근성이 떨어지기도 하고요. 또 규제 때문에 옛 공장 벽면을 유지하면서 오피스를 만들어야 했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채광이 안 좋아요. 오피스 자산은 교통과 채광, 그 두 가지가 정말 중요하거든요. 업계에선 ‘저걸 왜 오피스로 만들었을까. 주거시설로 만들었으면 참 잘 됐을 텐데’라는 의견이 나와요.”
현재 사이트에 공실 상태로 올라와있는 브루클린의 오피스 빌딩 ‘더 리파이너리 앳 도미노’ 의 한 사무실. 옛 설탕공장 벽면을 남긴 채 리노베이션했기 때문에 채광이 다소 부족한 편이다. 더 리파이너리 앳 도미노 홈페이지-듣기엔 성수동 같고 멋지겠다 싶은데, 오피스로는 아닌 거군요. 그런데 미국만이 아니라 타이베이, 홍콩, 자카르타, 암스테르담, 리야드 등.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셨는데요. 요즘 특히 뜨는 도시가 있을까요?
“리야드와 두바이, 중동의 이 두 시장이 오피스 쪽에선 가장 핫해요. 리야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비전 2030’을 발표한 이후에 우리 기업들이 기술 이전을 위해 많이 나가고 있고요. 두바이는 지금 전 세계 기업이 몰리면서 경쟁이 치열할 정도예요.
또 인도는 하이드라바드, 벵갈루루같이 IT 중심인 도시들이 핫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미국이 수요가 많죠. ‘메이드 인 USA’ 기조가 심해지고, 고관세가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보니 현지 생산에 대한 니즈가 커졌고요. 그래서 기업들이 공장과 물류 창고 쪽으로 신규 거점을 많이 찾아보고 있어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셰이크 자이드 로드를 지나는 차량 행렬과 스카이라인의 모습. 두바이는 최근 주택과 상업용 부동산 시장 모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AP 뉴시스
미국 공장 매입을 말리는 이유
-기업과 일하시면서 특별히 어려운 점이 있을까요?
“현지 관행에 대해 이해시켜 드리는 게 좀 어려운 점인데요. 예를 들어 우리 기업들의 약간 특징적인 게, 해외에서 비즈니스를 할 때 꼭 임대가 아니라 매수만 찾는 경우가 있어요. 특히 공장이나 물류창고의 경우에요. 워낙 큰 비용이 드니까, 나중에 팔아서 수익을 올리고 싶어 하는 거죠.”
-땅값이 올라서 남을 거라고 계산하나 보네요. 한국에선 그런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미국의 경우 이미 공장을 운영했던 땅을 ‘브라운 필드’라고 부르는데요. 기존 공장을 철거하고 새 공장을 짓기 위해 이런 땅을 매입하는 경우엔 리스크가 있습니다. 만약 해당 주나 도시에서 환경 오염 문제로 소송을 거는 경우, 그 책임을 땅 소유자가 져야 해요.”
-그런 소송이 많은가 보죠?
“네. 만약 소송으로 가서 손해배상금 판결이 나면 소유자가 물어줘야 해요. 그래서 저희는 브라운 필드를 매매하기보다는 ‘99년 임대’를 추천해 드리기도 하죠.”
-99년 임대가 있어요?
“네. 사실 미국 기업이 이미 많이 쓰는 전략이에요. 구글도 실리콘밸리 근처에 있는 나사(NASA) 부지를 그런 식으로 장기 임대해서 캠퍼스로 쓰고 있죠.”
구글이 나사 부지를 장기 임대해서 건설한 ‘베이 뷰 캠퍼스’ 모습. 4000명이 근무할 수 있는 공간이다. 구글 제공-99년 임대이면 임대료 같은 건 어떻게 될까요?
“저희가 그 99년 동안 임대료가 매년 크게 상승하지 않도록 캡(상한선)을 씌우는 작업을 하고요. 중도해지권도 넣을 수 있어요. 중간에 당국의 규제 등이 바뀌면 해지를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사실 99년이라고 하면 거부감을 많이 갖긴 하는데, 중도 해지도 가능하고, 소유해서 지게 되는 법적 책임도 피할 수 있죠. 또 99년이면 초기 공사비용과 인테리어 비용은 충분히 뽑게 되고요. 다만 이런 부분을 실무진뿐만 아니라 그 위 경영진에도 이해시키는 게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여러 기업을 담당하셨는데, 앞으로 이런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사가 더 많아질까요?
“좋은 브랜드를 가진 한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계속 늘어만 가잖아요. 얼마 전 농심의 암스테르담 오피스 신규 계약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요. 네덜란드가 K-푸드 수출액 성장률 1위 국가라고 해서 뿌듯했어요. 우리 기업이 계속 해외로 확장해 나갈 거기 때문에 저희가 할 일은 더 많아질 거고요. 한국을 잘 모르는 해외의 빌딩 임대인에게 좋은 한국 기업들을 소개하는 것도 이 업무를 하는 재미이자 보람입니다.” By. 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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