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늘어졌던 신경망이 호기심과 욕망으로 바싹 당겨집니다. 턱을 당기고 심각하게 휴대전화를 응시하는 나를 누가 봤다면 신곡 발표를 독단적으로 결정한 루미(‘케이팝데몬헌터스’)의 표정을 떠올렸을 지도.
“‘몬스터’ 신고 러닝 업그레이드하세요. 기록 단축에 최고거든요.”
발신자는 이전에 러닝용 모자를 거래한 적 있는 이웃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의 기획자는 당근마켓 인공지능(AI)가 틀림없어요. AI가 분석한 나는 대충 이런 인간입니다. 매일 러닝 장비빨 상품들을 검색하여 구매 관심목록을 작성 중인 ‘러닝&쇼핑 고관심자’, 완판된 디스트릭트비전 다케요시 러닝용 선글라스에 알림설정을 해놓았고, 카본 러닝운동화와 트레킹운동화를 볼 때마다 동공 확장 반응을 보이는 동시에 입문자용 러닝화와 장비들을 바로 바로 중고시장에 내던지고 있는 비합리적 몰입형 인간.
다행인지 불행인지 러닝을 꿈꾸는 중고거래 이웃들이 많습니다. 함께 달리는 거래크루(?)로서 대화는 진심과 열정으로 숨이 가쁠 정도입니다. 상대의 러닝 레벨에 관심을 보이며, 물건이 상대에게 적절한 것인지 조언하는데 망설임이 없습니다. 마지막 인사는 언제나 ‘화이팅입니다’라든지 ‘열심히 달리세요’ 같은 응원이고요. 상당히 서구적인 매너인지라, K-어색함이 익숙한 저는 종종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나의 ‘러닝1년차 장비빨’은 이처럼 다양한 러너들의 관심과 격려로 채워진 것입니다.
▷ O선글라스: 40대 러너로부터 구입. 상당한 경력의 소유자인 듯, 입문자인 내게 러닝의 정신과 기술, 러닝 코스를 가르쳐주려는 열정이 중학교 때 체육 선생님을 연상시켰음. 정작 거래한 선글라스는 내게 맞지 않아 지인에게 넘겼고, 디스트릭트비전으로 업그레이드 구매. 이를 알지 못하는 판매자는 ‘자신의’ 선글라스 덕분에 강한 가을 햇빛 아래에서도 내가 열심히 달리고 있는지 종종 확인 중.
▷ 한정판 카본 러닝 운동화: 판매자는 오픈런으로 어렵게 구매했다고 말한 고등학생. 애초 달리기보다 리세일이 목적이었던 듯. 한때 리세일가가 상당히 높았지만 매도 시점을 놓친 탓에 프리미엄은 합리적인 수준. 고등학생의 푸르디 푸른 시간을 투자했으니 이 정도는 지불해도 된다는 생각에 구매 결정. 그런데 학생, 어른이 되면 주식 거래 할 때는 매도 시점을 놓치지 말아요. 엘리트용 카본화는 위태로울 정도로 잘 달려줘 매우 만족. 초보운전자가 람보르기니를 사버린 격이긴 하지만, 람보르기니를 몰아본 사람이 후회하는 것을 본 적 있나.
▷ N사의 가쿠소우 바람막이: ‘가쿠소우’란 ‘역주행’이란 뜻으로, 기존의 룰에 반항하여 반대 방향으로 도쿄 도심을 달리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현란한 소개글에 충동거래. 기념비적 콜라보 컬렉션으로 중고 거래로만 구입이 가능. 달리는 방향이 정해져 있다니, 도쿄도 참 답답하네요. 그에 비하면 서울은 얼마나 자유로운 도시인가.
▷ 보라색 러닝 레깅스와 러닝 발가락 양말: AI알고리즘으로 포장 상태인 새 레깅스를 발견, 횡재하듯 구매. 판매자는 “딸이 러닝 동호회한다고 사놓고 통 가질 않아 대신 판매 중”이라고. 남의 일이 아니다. 러닝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나는 조용히 재활용 의류박스로 가겠어요.
▷ O사의 러닝 슈즈: 알림설정을 해놓은 덕분에 5:1의 경쟁을 뚫고 구매 성공. 20대 러너 판매자는 사이즈 실수로 새상품을 중고거래에 내놨기 때문인지 굳이 내 발에 잘 맞는지 발가락을 눌러 확인하고 거래에 동의.
이처럼 욕심나는 장비들을 하나씩 갖추다보면 필연적인 문제가 생기죠. 스포츠웨어의 중요한 디테일은 브랜드의 로고인지라 장비에만 몰두하면 자칫 스포츠용품 방출 행사장의 마네킹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최근엔 중고거래에 나온 마라톤 참가 굿즈를 보며 그 많은 수에 놀라기도 하고, 그 많은 성취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직접 참가하지 않은 마라톤 기념 티셔츠를 입고 달리는 것은 정당할까요? 이 티셔츠는 거래품이라고 일일이 밝혀야 할 것만 같아서요. 러너분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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