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은 러닝 [맛있는 중고이야기]

  • 동아일보

ⓒ ODRI AI 2025
ⓒ ODRI AI 2025
‘어쩔수가없다(박찬욱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한 단어로 써봅니다)’, 달릴 수 밖에. 달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수 만 가지 이유가 있지만 달리는 사람들은 ‘달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라고, 열병에 걸린 듯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달리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러너들의 번질거리는 땀, 거친 호흡이 서울이라는 도시를 초현실적으로 만드니까요. 그러다 ‘학익진’으로 길을 차단하며 달리는 무리(들), 경광등을 휘두르며 ‘비켜요, 비켜!’라고 외치거나 행인을 막고 앉아 로우앵글로 크루들을 촬영하는 열정의 ‘임원진’, 상의를 벗고 달리는 등 이른바 ‘민폐 러닝’를 맞닥뜨리면, ‘어서와 이게 한국이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로 말씀드리자면 걷기를 좋아해서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다가 문득 동네를 벗어나 서울 자락길을 거쳐 광화문 도심을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는 ‘게으른 산책러’였습니다. 그렇게 걷고 있는 나를 검은색 크루티를 맞춰 입은 이들이 “핫둘핫둘” 추월하기 시작했고, 어리둥절 그 속에 휩쓸려 무리가 지나가길 기다린 적도 있었습니다. 러너들의 근육과 피부는 오만한 빛을 뿜어내며 시선을 끕니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땀에 젖은 근육을 멋지게 드러내는 얇은 싱글렛(소매없는 마라톤 티)과 옆트임이 깊은 러닝 반바지, 근육을 팽팽하게 조이는 전용 양말, 플랫폼힐처럼 높은 쿠션이 장착된 카본 운동화였어요.

무엇보다 비와 빛, 벌레로부터 얼굴을 감싸듯 보호하는 고글형 선글래스의 아름다운 커브! 러닝 패션은 오뜨쿠튀르에서 영감을 받은 뒤, 테크놀로지의 유전자로 진보한 듯 보였어요. 역설적으로 러닝 패션은 제가 꽤 오랫동안 ‘달리지 않는 이유’가 되었어요. 히말라야급 착장으로 인왕산을 오르는 등산, 경기 한 번에 네다섯 번씩 옷을 갈아입으며 SNS에 올리는 골프와 테니스처럼 달리기마저 ‘장비빨’ 취미가 되는 건 싫었거든요. 그러나 쇼핑 ‘요요’가 러닝으로 폭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어요.

마침내 말도 달리는 계절이 되자 어쩔 수가 없었어요, 달릴 수 밖에. 원래 이랬나, 낯설 정도로 가을 하늘이 황홀하잖아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며, 걷다가 달릴 수 밖에요. 첫 달리기의 교훈은 오버사이즈 선글라스가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통증을 유발한다는 것, 땀으로 젖은 면티셔츠는 다시는 입지 않겠다는 것, 휴대폰과 물병을 안전하게 장착해야 하고 무릎과 발목은 보호하되 시간 단축은 마라톤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지. 살 수 밖에.

러닝하면서 당근을 하거나, 당근을 하면서 러닝하는 사람들은 공감하는 바, 올해 중고거래의 빛, 당근러의 사랑, 쇼핑의 죄는 러닝입니다. 달리기 전에 트렌디한 입문자용 용품을 사고, 한번 달려보면 반응성을 극대화하는 장비로 업그레이드 하고, 5km 마라톤에라도 참가한다면 프리미엄까지 붙은 엘리트 선수용품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러너들로 중고시장이 붐비고 있거든요. 덕분에 당근마켓이나 번개장터뿐 아니라 리세일마켓에서도 달리기 용품이 불티나게 거래되죠. 오픈런은 롤렉스에서 온러닝 카본화로, 샤넬에서 새티스파이 티셔츠로, 디올에서 디스트릭트비전 선글래스로 옮겨졌고 “좀 뛰네?”라는 말을 듣고 싶은 K-러너들은 리세일마켓에서 마라톤 역사를 새로 쓴 아이템들을 쇼핑합니다.

마라톤에 조예가 있는 작가 하루키는 “나 같은 사람은 그저 달리기에 편하다면 된다는 생각 ”이라며 발렌티노 상하의에 미소니 타월을 걸치고, 어울려 달리는 이탈리아 조깅족에 대해 신랄한 평을 한 바가 있어요. “이탈리아 조깅족을 보고 있으면 전쟁에 나가도 이기지 못하고 돌아올 것 같다”고요. 예전에 세상 쿨하다고 느꼈던 글이었는데 최근 다시 읽으니 뭐야, 하루키 씨 꽤 시대착오적이잖아, 라는 생각이 듭니다. 달리기는 ‘자신과의 약속’(노먼 해리스)으로 ‘의지의 끝을 마주하는 일’(프랭크 쇼터)이며 ‘내 자신을 바꿔 세상을 바꾸는’(캐서린 스위처) 숭고한 행위지만 요즘의 달리기란 ‘당근의 인기상’이자 새로운 ‘K-콘텐츠’인 것을요. 그러니 달리는 모든 이에게, 화이팅!

#건강한 생활#건강#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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