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기대감에 눈 뜨는 아침
군 귀농귀촌연구회장 맡아
초보 농군들 돕는 역할 자처
귀농은 은퇴 2~3년 전부터 준비
작물은 수익성 위주로 골라야
2020년, 지형운 씨(68)가 고향에 돌아왔다. 강원도 철원. 큰누나 지형숙 씨(73)가 살고 있고, 그가 중학교 때까지 개구쟁이 생활을 하던 곳이다.
처음엔 그저 좀 쉬어가려는 생각이었다. 2016년 30년간의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대학 강의와 사업 등을 전전하며 쉬지 않고 달려왔다. 베트남 중국 인도를 뛰어다니다가 중국에서 의류 무역업을 펼치던 시점에 하필 코로나 19 사태가 터졌다. ‘올스톱’ 상태가 된 상하이에서 철수했다.
“고향이 여기 있었네”
불과 몇 달 뒤, 그는 농부로 변신했다. 1400평 크기 비닐하우스 2개 동으로 구성된 ‘대형팜’을 짓고 노랑 빨강 색색 파프리카를 연간 30~40t씩 출하하고 있다. 농장이름 ‘대형’은 그의 아들 이름이다.
“아무 계획 없이 한 달가량 누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데 갑자기 제 눈에 고향산천 논밭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좋은 곳을 두고 힘들게 나가서 돌아다녔나’ 싶었죠. 이 참에 ‘고향에 뼈를 묻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15평 빌라를 빌려 살 곳부터 정했습니다.”
당시 63세. 철원에서 무엇을 하고 살지 고민했다. 남들은 연금으로 살면서 취미활동이나 하라고들 했지만 너무 지루할 것 같았다. 어릴 때 집에서 과수원을 했고 자신도 영북실고(농과)를 졸업해 농사에는 친근감이 있었다. ‘농사지으며 고향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수확의 기쁨, 말로 표현 못해”
그는 바로 군 농업기술센터가 운영하는 귀농귀촌교육을 신청했다. 교육을 받으며 축산도 고려해보고 벼농사나 과실작물도 생각해봤다. 최종적으로 철원 특산품인 토마토와 파프리카 중 무게가 가벼워 유통이 수월해보이는 파프리카를 택했다. 지인이 많은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를 택해 첫해에는 600평짜리 하우스를 운영했고, 이듬해 지금의 대형팜을 열었다.
“가장 즐겁고 보람찬 순간은 역시 수확할 때입니다. 수확의 기쁨이 있어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잊고 즐겁게 일할 수 있었죠.”
‘돌아온 탕아’처럼 나타나 농사를 짓겠다는 그에게 동창들은 짖굿게 놀려댔다. “야. 너 들깨 참깨 구분은 하냐?” “감자꽃 본 적은 있니?”
실제로 뒤늦게 귀농했다가 몇 년을 못 버티고 떠나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다들 ‘한 1,2년 저러다 말겠지’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귀농해서 5년간 벼농사를 짓던 지인도 얼마 전 논밭 다 팔고 떠나버렸지요. 벼농사는 상대적으로 덜 힘든데 이윤이 남질 않아요. 연간 3000만 원 정도 이익 남기려면 논이 1만 평은 있어야 하는데 땅값만 10억 원은 들 겁니다. 은행이자를 생각하면 버는 게 아니지요.”
‘한 1, 2년 저러다 말겠지’
남들이야 뭐라하건, 그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
“아침마다 빨리 농장에 가고 싶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갈 곳이 있다는 것도 좋고, 매일같이 달라진 모습으로 절 기다려주는 파프리카 나무들도 좋고. 농번기에는 농장에서 생활하는 일꾼 깨울까봐 억지로 늦게 나가는 날도 많았지요.”
파프리카는 1년생 작물이다. 하우스 농사라 해도 철원에서는 3월부터 11월까지 재배하고 한겨울은 쉰다. 한겨울 파프리카는 경남 진주 쪽에서 많이 재배한다고.
물론 농사는 녹록치 않았다. 그가 겪은 가장 큰 시련은 3년 전 하우스에 일어난 화재였다. 파프리카를 심은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온도 조절 기계가 불완전연소돼 불이 났다. 119가 와서 불을 껐고 수리비 일부는 보험처리했다.
2년 전 가을에는 쓰레기를 옮기다 배수로에 떨어져 오른쪽 어깨를 다쳤다. 오랜 기간 통증이 이어졌지만 지역 병원에서는 원인을 찾지 못했다. 지난해 8월 서울의 종합병원에 갔더니 힘줄이 끊어져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4일간의 입원시간을 내지 못해 수확이 다 끝난 12월 말에야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보조 기구를 메고 있다.
“이제 회복될 일만 남았어요. 2주일 정도만 더 이거 메고 다니면 됩니다. 하하.”
날 지켜준 ‘뒷배’는 고향이었다
그는 농고 졸업 뒤 자동차 공장에 취직했으나 고졸사원과 대졸사원의 급여차가 엄청난 현실을 깨닫고는 사직하고 대학진학을 준비했다. 동국대 식품공학과를 졸업한 뒤 1986년 국정원에 7급 공채로 입사해 충북지부장(1급)까지 역임하다 2016년 말 퇴직했다.
이후 충북 유원대 보건의료행정학과 초빙교수로 3년간 강의했고, 광주 DK산업 해외산업본부장을 거쳐 중국 상해 무역업체 부회장으로 중국에서 일했다.
―젊은 시절 방황이 많으셨다고요.
“고교도 대학도 입시실패를 겪으며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같아요. 오히려 국정원에 들어가면서 적성에 맞는다고 느꼈습니다.”
―그 직장은 정치바람 같은 게 많지는 않았는지요?
“그런 걸 많이 봤지만 저는 해당이 안 됐어요. 강원도 변방 출신이라 지역색도 없고 동국대가 또 그렇게 두드러진 학벌이 형성돼 있지도 않죠. 그곳에서 저를 지켜줬던 것은 직장에서 맺은 선배 상사들과의 인연이예요. 같이 근무하며 챙겨주고 끌어주고 하는. 그걸 혈연 지연 학연 외에 ‘직연’이라 하죠.
또하나, 고향에 돌아온 뒤 직장 후배들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퇴직하고 보니 나를 키워준 건 8할이 고향이었더라’고. 진급을 앞두고 치열한 경쟁을 할 때도 내 ‘뒷배’는 고향이었어요. ‘여기서 잘려도 난 돌아갈 곳이 있어’, ‘고향가서 농사나 지을란다’ 뭐 이런 든든함을 주는 뒷배 덕에 무사히 1급까지 마치고 퇴직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평생 도전하는 삶이었던 것같습니다. 농고 졸업 후 공돌이 생활도 해봤고 힘들게 진학한 대학에서 전공에 대한 방황이 이어졌죠. 국정원 입사도 그런 가운데 이뤄졌어요.
59세에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해 완주하고 61세에 중국어 공부를 시작해 중국 의류사업에 뛰어들었죠. 63세에 귀농해 64세부터 파프리카 농장을 경영하고 있죠.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고민할 때도 비닐하우스 농사가 수익은 많지만 제일 어렵고 힘들다고 해 도전해봤습니다.”
귀농귀촌 돕는 지역조직 활성화
그는 혼자만 많이 수확하는 것으로는 즐겁지 않았다. 자신처럼 어려움을 겪는 초보 농군들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며 유명무실하던 철원군 귀농귀촌연구회를 활성화시켰다. 2023년 3월 이 연구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약 100여 명의 회원들은 귀농자들이 현지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중개자 역할을 자임한다. 정기 모임과 회원농가 일손돕기, 성공적으로 정착한 회원들의 체험담 공유, 외부 인사 초청특강, 회원 수확물 공동판매사업 등을 통해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귀농귀촌을 꿈꾸는 동년배들에게 조언을 주신다면.
“은퇴 2~3년 전부터는 준비해야 합니다. 각 시군에 설치된 농업기술센터의 귀농귀촌 교육을 반드시 이수하세요. 초보 농업인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줍니다.
가능한 연고가 있는 지역을 선택하는 게 좋습니다. 고향이나 친척, 친구가 있는 곳, 전에 땅을 사놓은 곳, 멘토를 찾고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으세요. 그렇게 땅을 구입하고 현지 사람들과 교류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준비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작물선택에도 요령이 있다.
“작물은 수익이 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수익이 잘 나야 농사가 재미있어져요. 수익으로 봉사를 할 수도 있고, 생활비로 써도 됩니다. 농사를 전업, 직업으로 생각하면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죠. 귀농은 충분히 제2의 직업이 될 수 있어요. 시간을 가지고 알아보고 준비하고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귀농자들 중에는 지역 텃세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많던데요.
“텃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다만 입장을 좀 바꿔놓고 생각해봐야 해요. 밖에서 들어온 사람 입장에서는 텃세지만 오랜 세월 지역에서 살아온 분들 입장에서는 낯선 불편함이 있어요.
가령 마을 발전 기금만 해도 그래요. 마을 기금은 오랜 세월 주민들이 여러 형태로 십시일반해 마련해놓고 사용해온 거거든요. 밖에서 들어와 그동안 아무 기여도 없었는데 똑같은 혜택을 누리려 하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거죠. 저는 귀농인들에게 늘 ‘내가 먼저 주민들께 다가가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평생동지’ 같은 누나
―대형팜의 연간 매출은 어느 정도인지요?
“순수입 5000만 원 정도를 목표로 합니다. 될 때도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1명 쓰느냐 2명 쓰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철원군에는 베트남에서 계절노동자 형태로 인력이 들어온다. 그의 경우 1년 단위로 1명 또는 2명을 고용해 일을 해왔다. 외국인 노동자 임금은 철저히 국내 임금과 같아야 한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국 임금의 10배쯤 된다고 한다.
―다른 작물을 재배할 계획은?
“파프리카만 해도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전문성을 갖춰야 비용을 최소화하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거든요.”
취재 내내 큰누님이 어깨를 다친 그 대신 차를 운전해주고 커피를 타주며 세심하게 도왔다.
“누님은 제 평생 동지 같아요. 2년 전 매형이 돌아가셔서 혼자 계시니 마침 제가 와서 든든해하시기도 하고요.”
―가족은요?
“각자 바쁩니다. 아들은 미국에서, 딸은 부산에서 직장 다녀요. 아내는 아들이 있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지내는데 곧 손주가 나올 거라서 그곳에 머물 것 같습니다. 저도 겨울에 다녀올 계획이구요.”
‘평생 현역’이 꿈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적어도 75세까지는 제 손으로 농사지을 수 있다고 봅니다. 힘들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인력을 더 쓰면 되겠지요. 그때는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청소년대상 멘토 역할을 하면서 교회 봉사활동에 힘을 쏟을 것 같습니다. ‘평생 현역’으로 사는 게 꿈이예요. 하하.”
귀농귀촌연구회장으로서 목표는 토마토 파프리카는 물론, 오이 생강 대파 등 작목별로 수익모델을 만드는 것. 귀농인들끼리 도움을 주고 받으며 지역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바람도 있다.
그는 “귀농해 대파농사를 짓는 분이 있는데 초보 농군이라 실패가 잦았습니다. 하지만 저희 연구회 농업기술분과위원장의 컨설팅을 통해 지난해에는 큰 수익을 창출했어요. 귀농은 우선 좋은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저희 연구회 회원들같은 멘토를 만나신다면 성공이 보장되죠.”
이런 그의 관심은 지방소멸이나 인구감소까지 확산된다. “철원 인구가 약 4만 명인데 매년 1000명씩 줄고 있다고 해요. 많은 귀농인들이 철원으로 와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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