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6개월 사전제작… ‘태후’가 판을 바꿨지 말입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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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의 진화

100% 사전 제작된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6개월 동안 촬영하고 이후 2개월간 후반작업을 진행해 완성도를 높였다. 주연을 맡은 송중기와 송혜교도 지난달 중순 기자간담회에서 “시청자의 마음으로 ‘본방사수’하고있다”고 말했다. 태양의후예문화산업전문회사 & 뉴 제공
100% 사전 제작된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6개월 동안 촬영하고 이후 2개월간 후반작업을 진행해 완성도를 높였다. 주연을 맡은 송중기와 송혜교도 지난달 중순 기자간담회에서 “시청자의 마음으로 ‘본방사수’하고있다”고 말했다. 태양의후예문화산업전문회사 & 뉴 제공
“판 뒤집혔다.” 지난해 1341만 관객을 모으며 최고 흥행작이 된 영화 ‘베테랑’ 속 서도철(황정민) 형사가 남긴 명대사다.

올해 한국 드라마 판도 마찬가지다. 100% 사전 제작한 드라마 KBS ‘태양의 후예’(태후)가 등장해 시청률 30%를 웃돌며 ‘태후 신드롬’을 일으켰다. 실패 사례밖에 없었던 사전 제작 드라마의 성공 사례를 만들며 ‘당일치기 쪽대본’ ‘실시간 제작’이라고 비판을 받던 기존 드라마 제작의 패러다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시리즈물로 나온 케이블 채널 tvN ‘응답하라 1988’은 지상파 드라마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고, 같은 채널의 ‘시그널’도 마니아용으로 여겨져 온 장르 드라마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태후’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태후’의 제작사는 영화배급투자사로 널리 알려진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뉴)’다. 뉴는 영화배급투자사 쇼박스 대표를 지낸 김우택 총괄대표가 2008년 9월 설립한 역사가 짧은 회사다. 하지만 1000만 관객을 넘은 ‘7번방의 선물’(2013년)과 ‘변호인’(2013년)을 비롯해 ‘신세계’(2012년) ‘부러진 화살’(2011년) 등 화제의 영화를 여러 편 성공시키며 영화업계에서는 새로운 강자로 자리 잡고 있다. 뉴는 CJ E&M, 롯데엔터테인먼트 등 대기업 계열의 큰 영화사들을 제치고 2013년 업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뉴 김우택 총괄대표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전부터 종합 콘텐츠 제작회사로 나아가는 단계에서 기회가 생긴다면 드라마 제작에도 과감하게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기회는 2014년 여름에 찾아왔다. ‘태후’의 원작은 2011년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김원석 작가의 ‘국경없는 의사회’. 이 각본은 영화 제작자인 서우식 전 바른손 대표에 의해 드라마로 기획되고 있었다. ‘파리의 연인’(2004년) ‘시크릿 가든’(2010년) ‘신사의 품격’(2012년) 등의 각본을 쓴 김은숙 작가가 합류해 7, 8명의 의사가 펼치는 재난물이었던 원작을 멜로드라마로 바꿨다. 하지만 드라마는 2014년 여름 SBS에서 편성이 될 뻔했지만 불발됐다. ‘용팔이’ ‘리멤버: 아들의 전쟁(이상 2015년) 등 다른 드라마에 밀렸기 때문이다. 이후 서 대표와 친분이 있는 뉴 김 대표가 드라마를 제작하기로 결정했고 영화에서 역량을 인정받은 뉴가 합류하자 드라마 제작은 급물살을 탔다.

뉴 관계자는 “당시 2부까지 완성된 ‘태후’ 대본과 콘티가 무척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총제작비가 130억 원이 들어가는, 드라마로는 보기 드문 큰 규모였지만 뉴는 영화에서 쌓은 노하우를 활용해 방영권 및 판권 판매, 부가수익 창출 등 드라마 제작을 위한 재원을 마련할 구조를 설계했다.

중국 시장을 겨냥해 사전 제작으로 드라마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중국 최대 동영상 플랫폼인 아이치이에는 회당 2만5000달러(16회 총 40만 달러, 약 46억 원)에 판권도 수출했다. 뉴 관계자는 “사전 제작 시스템은 제작을 한 뒤 관객에게 내놓는 영화 시스템과 다르지 않아 오히려 수월했다”고 말했다.

16부작 미니시리즈 촬영 기간은 보통 3, 4개월. 하지만 ‘태후’는 6개월이 걸렸다. 건물이 무너지는 재난 장면 촬영 등의 사전 준비에 공을 들였고 촬영 뒤에도 부족한 부분은 재촬영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비가 오는 등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원하는 장면을 얻기 위해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촬영 후 2월 말 첫 방송이 시작될 때까지 두 달 동안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편집 등 후반 작업을 거치며 공을 들였다.

매 회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공들인 드라마에 시청자도 응답했다. 영상미로 시청자를 홀린 ‘태후’는 ‘송송(송중기 송혜교) 커플’의 조합과 빼어난 완성도로 3회 만에 시청률 23.4%(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기록했다. SBS가 ‘태후’ 대신 선택한 ‘용팔이’의 최고시청률 21.5%를 넘었다. 13회까지 매회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며 시청률 40%를 바라보고 있다.

‘태후’의 성공으로 한국 드라마 제작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제작비를 확보하고 예산을 책정해 사전 제작 혹은 반(半) 사전 제작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미국식 드라마 제작 시스템이 우리나라에 도입될까?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태후’의 성공으로 100% 사전 제작 드라마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예전보다 높아졌다”고 말했다. ‘태후’에 이어 ‘사임당 더 허스토리’(SBS) ‘함부로 애틋하게’(KBS2) ‘화랑: 더 비기닝’(KBS2) 등 100% 사전 제작 드라마가 올해 안에 방영될 예정이다.

반면 사전 제작 드라마를 바라보는 우려의 시각 또한 적지 않다. 드라마 방영 전 성공에 대해 아무도 장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드라마 제작 환경이 톱스타나 유명 작가 위주로 더 쏠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럴 경우 다양한 콘텐츠가 나오기 힘들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태후’의 경우 송혜교는 중국에서 검증된 한류스타이고 김은숙 작가도 톱스타 못지않게 몸값이 높은 스타 작가다.

올 하반기 방영할 예정인 100% 사전 제작 드라마 ‘사임당, 더 허스토리’. SBS 제공
올 하반기 방영할 예정인 100% 사전 제작 드라마 ‘사임당, 더 허스토리’. SBS 제공
‘사임당…’에는 원조 한류 배우로 평가받는 이영애가, ‘함부로…’에는 중화권에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김우빈이 출연한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결국 중국 자본 등 투자자가 원하는 배우·연출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케이블에서도 통한 장르물의 진화

사전 제작 드라마뿐만 아니라 올해는 한국 드라마에서 시리즈물과 장르물이 성공적으로 안착한 해다. 이전까지 막장 드라마가 득세하던 흐름에도 균열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응답하라’ 세 번째 시리즈로 많은 사랑을 받은 tvN ‘응답하라 1988’. CJ E&M 제공
‘응답하라’ 세 번째 시리즈로 많은 사랑을 받은 tvN ‘응답하라 1988’. CJ E&M 제공
1월 종영한 tvN ‘응답하라 1988’(응팔)은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는 통념을 깨고 폭넓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마지막 회인 20화는 시청률이 19.6%(닐슨코리아 전국 유료 가구 기준)까지 나오며 역대 케이블 채널 최고 시청률인 엠넷의 ‘슈퍼스타K2’ 결승전 시청률(2010년 10월 22일, 18.1%)을 넘어섰다. tvN은 ‘응팔’을 통해 171억 원의 광고 매출을 올렸다. 주문형 비디오(VOD) 매출도 50억 원 이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케이블 채널 역대 최고 기록이다.

장르물인 ‘시그널’의 성공도 반갑다. 보통 장르 드라마는 소수 마니아층의 드라마로 인식돼 왔다. 수사물에 러브 라인조차 없는 ‘시그널’은 지상파에서 한 차례 퇴짜를 맞은 뒤 tvN에서 편성이 결정됐다. 하지만 최고시청률 12.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넘으며 대박을 쳤다.

‘시그널’ 제작진이 밝힌 성공 비결은 ‘반 사전 제작’과 ‘장르물 본연에 집중한 전략’이다. 원래 SBS에서 박해영(이재훈)과의 러브라인을 위해 30대 초중반 나이로 설정됐던 차수현(김혜수)은 tvN에서는 이재한(조진웅)과 박해영을 연결할 수 있는 40대 중반으로 변경됐다. 전직 프로파일러 출신 보조 작가가 대본 작업에 투입되며 작품의 사실감을 더했다. 치밀한 전개와 디테일한 내용에 시청자들은 “최고의 수사물”이라고 평가했다.

케이블 드라마로는 높은 수준인 7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됐지만 반 사전 제작으로 작품성을 높이고 시청자의 호응을 얻으며 판권 판매, VOD 매출 등으로 제작비를 회수했다. ‘시그널’ 관계자는 “막바지까지 촬영을 완료한 뒤 2주 넘는 여유 기간을 두고 후반 작업을 진행해 완성도를 높였다”고 말했다.


▼‘미드’ 못지않은 완성도… 수사 드라마 숨은 주역▼

“문제는 디테일” 프로파일러-협상 전문가 투입해 사실성 높여

tvN ‘시그널’에 보조 작가로 참여한 전 경찰 프로파일러 출신 김윤희 씨(왼쪽)와 ‘피리 부는 사나이’의 자문을 맡은 경찰대 이종화 교수. CJ E&M 제공
tvN ‘시그널’에 보조 작가로 참여한 전 경찰 프로파일러 출신 김윤희 씨(왼쪽)와 ‘피리 부는 사나이’의 자문을 맡은 경찰대 이종화 교수. CJ E&M 제공
한국 수사드라마가 달라지고 있다.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전처럼 사건을 얼렁뚱땅 해결하지 않는다. 사건을 수사하는 디테일도 섬세해졌다. 극에 사실감을 더하는 ‘숨은 전문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시그널’에 보조 작가로 참여한 전직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 김윤희 씨(37)와 tvN ‘피리 부는 사나이’의 자문을 맡은 경찰대 이종화 교수(53)를 만나 이들이 드라마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들어봤다.

디테일을 살린 전직 프로파일러

“(드라마의 메인 작가인) 김은희 작가에게 많이 받은 질문은 ‘이런 상황이 실제로 가능하냐’, ‘개연성이 있느냐’였어요.”

‘시그널’의 보조 작가 김 씨는 경찰 생활 8년 중 5년을 서울지방경찰청 범죄분석요원으로 근무했다. 2년 전 경찰복을 벗고 배우와 작가를 꿈꾸던 김 씨는 전문가를 찾던 ‘시그널’ 제작진에게 발탁됐다. 김 씨는 실제 프로파일러가 어떻게 증거를 수집하고 행동하는지를 메인 작가에게 알려줬다.

“프로파일링을 통해 본 범죄자는 사회성이 떨어지고 강박 성향이 있으며 이를 없애려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인물이었죠. 드라마에서 편의점을 항상 정돈하는 홍원동 연쇄살인사건의 범인 진우(이상엽)라는 캐릭터도 이를 바탕으로 탄생했죠.”

홍원동 사건을 구성하는 데는 김 씨의 공이 컸다. 김 씨는 홍원동 사건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인 ‘서울 양천구 신정동 연쇄살인사건’을 프로파일링한 경험이 있다.
범인을 추적하던 형사 차수현(김혜수)이 피해자들이 다닌 골목을 배회하는 장면도 이전 수사물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범인의 시각이 아니라 피해자의 시각으로 사건 현장을 다시 본 것이다.

김 씨가 바라는 수사물의 모습은 어떤 걸까. “그동안 국내 수사극에서는 경찰 눈으로 보면 ‘이건 아닌데’ 하는 내용이 많았죠. 미드(미국 드라마)처럼 첨단 수사기법과 꼼꼼한 수사 등을 국내 드라마가 보여준다면 경찰로서도 참고할 만할 것 같아요.”

드라마에 등장한 생소한 협상전문가

“경찰이 상대하는 사람은 범인이든 누구든 우선 도와줘야 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위기자’라 불러야 해요. 이들을 살살 달래야지, 조사하듯 딱딱한 말투로 대하면 안 되죠.”

강력계를 주로 소재로 삼던 이전 드라마와 달리 드라마 ‘피리 부는 사나이’는 경찰 ‘위기협상팀’을 다뤘다. 생소한 분야에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경찰대 이종화 교수가 나섰다. 이 교수는 미국 뉴욕경찰(NYPD)과 연방수사국(FBI)에서 위기협상 과정을 수료한 전문가다. 그는 “사고는 ‘위기자’의 감정이 고조된 상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며 “대화로 그들의 감정을 어루만져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드라마 각본을 쓴 류용재 작가에게 경찰대에 개설된 ‘협상 강의’를 듣게 했다. 이 교수는 류 작가에게 “협상관의 말투는 부드러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의 조언에 따라 탄생한캐릭터인 협상팀 여명하 경위(조윤희)는 위기 상황에서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사건을 해결한다.

그가 바라는 수사물의 모습은 어떤 걸까. “올해도 자살을 기도한 두 명의 ‘위기자’를 협상을 통해 구했어요. 소통이 부족한 때일수록 협상이 꼭 필요합니다. 드라마를 통해 경찰뿐 아니라 많은 분이 위기협상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김배중 wanted@donga.com·이새샘 기자  
#태양의후예#응답하라1988#사임당#시그널#피리 부는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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