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김지하가 회상하는 천재 감독 이만희, “욕 잘하는 내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9일 16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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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영 씨가 직접 고른 아버지 이만희 감독 사진. “손으로 반쯤 가린 아버지 얼굴이 신비해서 좋다”고 했다.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이혜영 씨가 직접 고른 아버지 이만희 감독 사진. “손으로 반쯤 가린 아버지 얼굴이 신비해서 좋다”고 했다.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열 살 나던 해부터 몇 해간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시간이 이어졌어요. 그 시절 일 년에 한 번 아버지 얼굴 보기도 힘들었었죠. 바깥에서 무얼 하고 계셨을까, 늘 궁금했어요.”

13일 영화배우 이혜영 씨(53)는 서울을 출발해 강원도 원주로 함께 타고 가던 차 안에서 입을 열었다. 그의 아버지 이만희 영화감독(1931~1975)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개성 있는 감독의 한 사람이자 ‘천재’로 꼽혔다.

바깥에선 영화 ‘만추’를 만든 작가주의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집에서는 장난기 많은 아빠였다. 그는 남매를 지프차에 태워 남산으로 데려가 케이블카를 태워주고, 집에서 쉴 때면 손수 볶음밥도 해줬다. 그런 아버지가 1970년 이후 ‘영화판’이 침체되고 건강까지 나빠지면서 남매를 거의 돌보지 못했다. 그러다 1975년 4월 영화 ‘삼포 가는 길’ 편집 중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갑작스레 세상을 등졌다. 불과 마흔 넷이었다.

이 씨의 원주행은 몇 해 전 김지하 시인(74)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을 읽다 발견한 ‘그 무렵 내가 좋아하던 영화감독 이만희 형님’이란 글귀에서 시작됐다. 이 씨가 평생 늘 궁금해 하던 그 시절 아버지와 김 시인은 가까웠다. 김 시인이 열 살 아래였지만 호칭은 이 형, 이 감독이었다. 1973년 김 시인이 명동성당에서 결혼할 때 이 감독이 결혼식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김 시인은 민청학련 사건 등에 연루돼 독재 정권에 쫓기던 중 1974년 이 감독이 영화 ‘청녀’를 찍고 있던 전남 홍도의 촬영장에서 검거됐다.

13일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김지하 시인(왼쪽)과 영화배우 이혜영 씨. 
이날 김 시인은 1974년 경찰에 체포되던 자신을 보며 오열하던 이만희 감독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형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내가 외아들이라 형제가 없어 그 마음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게 인간 이만희의 인간성이었다.” 사진=김경제기자 kjk5873@donga.com
13일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김지하 시인(왼쪽)과 영화배우 이혜영 씨. 이날 김 시인은 1974년 경찰에 체포되던 자신을 보며 오열하던 이만희 감독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형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내가 외아들이라 형제가 없어 그 마음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게 인간 이만희의 인간성이었다.” 사진=김경제기자 kjk5873@donga.com
아버지의 별세 40주기를 맞아 용기를 낸 이 씨는 원주 토지문화관을 찾아가 김 시인을 만났다. 이 씨는 책 ‘영화감독 이만희’ ‘영화천재 이만희’와 ‘청녀’ DVD를 건넸다. 그러면서 김 시인에게 “직접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청했다.

김 시인은 책 표지 속 이 감독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해 김 시인은 이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김원두와 함께 목포행 기차를 타고 홍도로 내려갔다. 김 시인은 기차 안에서 겨울 설악산을 배경으로 절망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나리오를 이 감독에게 들려줬다. 김 시인은 “그때 이 형이 소주 한 잔 들이키더니 운동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나하고 영화하자고 했다. 위대한 감독이 나하고 영화하자니 얼마나 근사했던지”하고 회고했다. 하지만 김 시인은 “훗날 이 감독이 ‘예술가는 순식간에 혁명을 한다’고 했던 것처럼 (나도)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보고선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영화 캐스팅에 대한 ‘농반진반’도 있었다. “당시 내가 워낙 드세고 욕을 잘 했는데 그런 날 보고 가만히 웃으며 ‘영화에 나오면 히트치겠다’고 한 것도 생각난다. 욕, 막말엔 추(醜)의 미학이 있다.”(김 시인)

이 씨가 아버지의 시나리오 작가 필명도 ‘추남’이었다고 들려주자 김 시인은 껄껄 웃었다.

이 씨는 “‘만추’ 제작자 호현찬 씨가 ‘이만희 감독과 하길종 감독이 오래 살았다면 한국 영화판이 바뀌었을거다’고 했는데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김 시인은 “(동의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공공연히 그 말을 하고 다녔다”고 했다.

“한국 전통의 것을 제대로 살린 이 감독과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한 하길종이 함께 영화판을 이끌었다면 내가 꿈꾸던 문화 르네상스가 왔을 것이야. 이 감독을 희망으로 삼았는데 일찍 가시면서 꿈이 사그라들었어.”

이 감독의 묘비명은 김승옥 소설가(74)가 썼다. ‘당신은 포탄 속에 묵묵히 포복하는 병사들 편이었고 좌절을 알면서도 인간의 길을 가는 연인들 편이었고 그리고 폭력이 미워 강한 힘을 길러야 했던 젊은이의 편이었다.’

이 감독은 엄혹한 반공 이데올로기 분위 속에서도 작가적 신념을 지키려 애썼다. 1965년엔 영화 ‘7인의 여포로’에서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가 용공주의자로 몰려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씨는 “아버지는 군사정권 시절에도 인간 각자의 사정을 세심하게 헤아리는 휴머니즘을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반공이 아니라 반전을 얘기하다가 고초를 겪었다”고 했다. 김 시인도 “이 감독은 반전을 이야기했다”고 동의했다.

생전 이 감독은 영화 51편을 찍었지만 ‘만추’ ‘시장’ 등이 유실돼 26편만 남아 있다. 별세 이후 오랜 기간 잊혀졌다가 2000년대 이후 젊은 영화감독, 평론가들이 그를 다시 호명하며 재평가되고 있다. ‘만추’는 2010년 김태용 감독이 현빈과 탕웨이 주연으로 4번째 리메이크하며 세기를 뛰어 넘었다.

김 시인은 대화를 마치며 “한국 영화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감독인데 영향력이 점점 사라지고 살려내려는 사람도 적다. 당신에겐 아버지지만 추억의 대상으로만 볼 인물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씨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씨는 원주를 떠나며 “아버지 시대를 함께 산 김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려고 했는데 새로운 숙제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 50주기엔 사라진 ‘만추’ 필름을 꼭 찾겠다고 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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