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영웅에서 좌파 간첩 역적으로’…‘서프라이즈’ 오펜하이머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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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4일 11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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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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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국가적인 영웅에서 소련과 내통한 역적으로 하루아침에 몰락한 사나이….’

미국 원자폭탄 개발 총 책임자였으나, 수소폭탄 개발을 거부해 모든 것을 잃은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가 4일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통해 재조명됐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물리학과 오펜하이머 교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독일계 유대인이던 그는 독일 나치가 원자폭탄 개발해 세계 재패할지 모른다는 대통령의 말에 프로젝트 총책임자 역할을 수락한 것이다.

3년 후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뉴멕시코에서 실시된 테스트 성공 후 원자폭탄은 2차 대전에 투입된다. 한 달 후 1945년 8월 6일 미국 히로시마에 투하됐다. 반경 3km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14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7만 명이 사망했다.

오펜하이머는 인류에게 핵이라는 불을 선사했다며,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렸다. 타임지 표지에도 등장했으며, 학자로도 최고의 권위를 얻게 됐다. 원자력 위원회 의장 미국 주요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1954년 상황은 역전됐다. 그가 하루아침에 매국노, 변절자로 몰리며 청문회에 소환당한 것이다.

당시 정부가 오펜하이머에게 수소폭탄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리는데 그가 그걸 반대한 것이다.

당시는 미소 대립 냉전의 시대였으며, 1949년 소련이 원폭 개발에 성공하고 수소 폭탄 개발에 뛰어들자 미국은 큰 위기감에 봉착했다. 더구나 미국엔 매카시즘 광풍(좌익 분자 색출 운동)이 몰고 있었다.

소련의 스파이로 몰린 그는 과거 열렬한 공산주의자인 애인까지 공개됐다. 게다가 부인 캐서린 해리슨과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 친구가 공산주의자라는 점이 속속 드러났다.

결국 청문회 후 그는 공산주의자 혐의는 벗었으나 잠재적인 위험분자로 분류돼 모든 공직으로부터 추방됐다.

사실 그는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자 그가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 신경쇠약까지 걸렸던 그는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됐다”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다. 그는 1967년 63세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한편 이날 ‘서프라이즈’는 일제가 날조한 역사 ‘고려장’, 프랑스 대표 조각가 로뎅과 그의 뮤즈 까미유 끌로델의 광기어린 사랑에 대해서도 담아냈다.

동아닷컴 온라인뉴스팀 기사제보 st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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