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강유정] 채민서라는 배우로 해석된 소설적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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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4일 16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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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의 연작 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영화화한 영화 \'채식주의자\'. 악몽에 시달리다 채식주의를 선언하게 되는 영혜(채민서)와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하는 형부 민호(김현성)의 금기의 욕망을 다뤘다. ☞ 사진 더 보기
소설가 한강의 연작 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영화화한 영화 \'채식주의자\'. 악몽에 시달리다 채식주의를 선언하게 되는 영혜(채민서)와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하는 형부 민호(김현성)의 금기의 욕망을 다뤘다. ☞ 사진 더 보기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과 만화를 영화화하는 것은 어떻게 같고 다를까?

만화를 영화화할 때에는 이미 만화가가 제시한 이미지와의 동일성 및 차별성이 관건이 될 것이다.

가령, 인터넷 연재 시 화제를 불러 모았던 윤태호의 '이끼'가 영화화될 때에는 만화가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제시한 "마을"의 이미지가 반영되어야만 한다. 이미 만화가가 공들여 만들어 놓았기에,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그 이미지를 거절하기 힘들 것이다.

강우석 감독이 만드는 '이끼'가 윤태호의 원작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 공간적, 건축적 이미지를 살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 한강의 원작, 그리고 임우성 감독의 영화 '채식주의자'

그런데 소설은 좀 다르다. 어려운 말로 하자면, 소설의 비 지정 영역이라는 부분이 너무 넓으니 말이다.

가령, 소설 속에서 어떤 한 여자를 설명한다고 해 보자.

"허리는 놀랄 만큼 가파른 곡선으로 오목하게 휘어 있었고, 많지 않은 숱의 체모, 허벅지에서 종아리로 이어지는 선 역시 볼륨감이 부족하다는 것 외에는 군더더기 없이 매혹적이었다."

이 문장은 매우 구체적으로 한 여자의 이미지를 설명해주고 있지만 무엇보다 강렬한 힘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바로 "매혹적이었다"라는 문장이다.

그런데 말이다. 과연 "매혹적이었다"는 게 무엇일까? 매혹만큼 주관적인 것이 있을까? 아마도 독자는 이 "매혹"을 나름의, 각자의 기준에 맞춰 상상하고 그려낼 것이다. 만일 영화로 만든다면, 감독 역시도 이 "매혹"에 대해 상상하고 그려 낼 것이다.

영화 '채식주의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임우성 감독의 '채식주의자'는 한강의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영화 '채식주의자'는 최대한 원작의 분위기와 톤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각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우성이 해석한 "매혹"은 채민서라는 배우로 구체화된다. 채민서는 "여자 김명민"이라고 불릴 정도로 체중을 감량하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요령부득의 여자를 만들어내는 데 매진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채민서의 외양과 연기, 표정의 스펙트럼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녀의 어떤 모습보다 "매혹"적이다. 배우로서 본다 해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음에 분명하다.
꽃, 나무가 되고 싶었던 채식주의자 영혜. ☞ 사진 더 보기
꽃, 나무가 되고 싶었던 채식주의자 영혜. ☞ 사진 더 보기

▶ 미친 여자의 행동들은, 그럴 듯한 행위로 다가온다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선언한 여자의 정신적 파멸기라고 할 수 있다. 너무도 평범하게, 너나 나처럼 그녀는 고기를 먹고, 섹스를 하고, 결혼을 해서 살았다. 별 다를 것이라고는 없었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거추장스러운 속옷을 싫어한다는 정도? 그랬던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냉장고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고기 냄새 때문에 참을 수 없다며 모두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이다. 고기 냄새는 남편에게도 난다. 고기를 먹지 않는 여자를 세상은 이상하게 바라본다. 그녀는 건강이나 웰빙을 위해 채식을 하는 여자와는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먹는다는 것을 행복이 아닌 요식행위로 받아들이는 여자에게 음식은 비료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가장 먼저 남편이 멀어진다. 그리고 친정 부모들도 그녀를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닦달한다. 마침내, 여자는 손목을 그어 버리는 극단의 선택을 한다.

잠깐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녀는 참 이상한 여자이다. 관건은 이 이상한 여자의 선택과 행동을 "어떻게" 보여주느냐는 것일 테다. 상식적인 입장, 법과 규칙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녀의 행동은 "미친 짓"이다. 우리는 이 불편한 행동들을 "미친 짓"이라 부르며 병동에 격리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 불편함에 대해 관객들에게 설명하려 한다. 그것은 소설 원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상적인 장면들을 통해 미친 여자의 행동들은, 그럴 듯한 행위로 다가온다. 그럴 듯한 행위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그렇게 살지는 않지만 충분히 이해되는 동기라는 공감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처럼 채식을 하며, 손목에 칼을 대지는 않지만 누구나 한 번 쯤 그렇게 미쳐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고 말이다.
영혜의 채식주의 선언은 가족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던 어느날,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에게 아버지는 고기 먹을 것을 강요하며 폭력적으로 변한다. ☞ 사진 더 보기
영혜의 채식주의 선언은 가족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던 어느날,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에게 아버지는 고기 먹을 것을 강요하며 폭력적으로 변한다. ☞ 사진 더 보기

▶ 형부와 처제, 금기의 욕망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미쳐버린 여동생의 남편, 그녀의 형부, 언니 세 사람의 시각으로 진행되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영혜라는 인물, 형부, 언니 세 사람을 통해 진행된다.

미술가인 형부와 영혜의 결합, 그들을 바라보는 언니는 예술과 현실, 욕망과 법, 광기와 정상성의 경계들을 나눠 갖는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마음 속 깊은 곳에 억눌린 진정한 삶에 대한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이고 언니의 관점에서 본다면 패륜이며 폭력이다.

영화는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한다. 예술가인 형부는 스무 살이 넘도록 엉덩이에 남아 있다는 처제의 몽고반점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낀다. 그는 그 몽고반점을 화폭에 그리고 카메라에 담고자 한다. 그녀는 식물처럼 형부의 요구에 응한다. 그리고 마침내, 꽃의 수술이 암술에 닿듯이 형부는 온 몸에 꽃을 그린 채 처제의 몸속에 들어간다.

사실 형부와 처제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묶어 준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어느 날 이혼을 한다면 처제와 형부는 그저 남남으로 되돌아가는 단순히 남, 녀의 관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자명한 사실은 생활세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소설 속 영혜와 그녀의 형부는 이 불편한 사실을 예술적 에너지와 원시적 생명력으로 넘어간다. 영화 역시 소설의 선택을 존중한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소설의 문체와 달리 영화적 앵글에 담긴 이들의 행동은 매우 사실적이기에 몰입을 저해하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 속 누군가 상상의 목소리로 전해 들었던 형부, 남자의 예술적 욕망은 누군가 연기자의 눈빛에 걸러지면서 단 하나의 얼굴이 된다. 그 얼굴에는 예술가의 욕망도 있지만 그저 여자를 탐하는 남자의 눈빛도 있다. 원작의 파토스 전부를 소설이 이뤄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예술가인 민호는 계속되는 슬럼프에 괴로워하던 중 아내로부터 처제인 영혜가 스무 살까지 몽고반점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렬한 예술적 영감에 사로잡히는데…. ☞ 사진 더 보기
예술가인 민호는 계속되는 슬럼프에 괴로워하던 중 아내로부터 처제인 영혜가 스무 살까지 몽고반점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렬한 예술적 영감에 사로잡히는데…. ☞ 사진 더 보기

▶ '패륜 논란'을 잠시 접어 둔다면…

그러니, 아마 영화 '채식주의자'를 보기 위해 영화관에 들어가는 관객들은 잠시 생활의 전도사인 언니의 시각을 잠시 접어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바타'를 보기 위해서는 판도라를 긍정해야 하듯, '채식주의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구겨 넣어 두었던, 곰팡내 나는 욕망을 다시 꺼내야 한다.

법이나 규칙, 질서로 이뤄진 세상을 잊고, 금지가 없다면 순전하게 욕망하는 것을 바라볼 때, 영화 '채식주의자'의 매혹은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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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영상 = ‘패륜 논란’ 영화 채식주의자 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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