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최영일]랩으로 노래하는 씨알 철학자, 취랩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17일 11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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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랩(김대룡)은 언더그라운드 힙합가수로 9월 1집 앨범 \'증오에서 삶으로 LP\'를 발매했다.(촬영=스포츠동아 양회성)
취랩(김대룡)은 언더그라운드 힙합가수로 9월 1집 앨범 \'증오에서 삶으로 LP\'를 발매했다.(촬영=스포츠동아 양회성)
오래된 영화가 하나 있다. 1988년 개봉작 '잡초(Weeds)'다.

연기파 배우 닉 놀테가 연기한 주인공 엄스테더는 악명 높은 산퀀틴 교도소에 수감된 무기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환경 속에서 범죄에 빠져 교도소를 들락거리다 중죄인이 되었다. 좌절의 나날을 못 견뎌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던 그는 어느 날 위문공연을 온 극단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다가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그는 희곡을 쓰기 시작하고, 재소자들을 오디션하여 극단을 꾸리고 자신의 연극을 공연한다. 그의 연극을 관람한 평론가 릴리안과 사랑에 빠지고 가석방의 기쁨까지 맛본다. 하지만 사회는 전과자인 엄스테더를 혹평한다. 급기야 그의 작품을 보던 죄수들은 폭동을 일으켜 그의 진심은 위기에 처한다.

이 영화에서 사회의 쓰레기로 전락한 한 인간이 연극의 대사를 멍하니 듣다가 불현듯 깨달음을 얻는 대목은 명장면이다. 이 모습을 우리나라의 한 래퍼가 가진 얼굴에서 다시 읽었다. 커다란 감동으로.

▶ '증오에서 삶으로' 갱스터 래퍼 취랩

취랩. 본명은 김대룡. 그는 9월 첫 앨범 '증오에서 삶으로 LP'를 내놓았다. 내년이면 서른넷. 힙합전사로는 젊지 않은 나이다. 이 늦은 데뷔 이전 그의 삶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이었다. 두 여동생이 있는 삼남매의 장남으로 부모가 이혼하고 할머니와 살면서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등바등 살았지만 끔찍한 가난과 결손가정 아이에 대한 사회적 냉대로 결국 폭력과 범죄에 빠져 전과자가 되었다. 그는 현대의 수감제도는 '감화'를 일으키기는커녕 '동화'를 재촉한다고 토로한다. "재소자 1000 명 중 한명이라도 마음을 제대로 잡고 새 삶을 찾는다면 성공"이라고도 말한다. 그런 그가 출소 후 힙합 뮤지션으로, 자신만의 어두운 경험을 랩으로 총알처럼 내뱉는 래퍼가 되었다. 그는 어떻게 스스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던 걸까?

그의 앨범이 출시되자 언론은 호기심으로 그를 다뤘다. 심지어 '대한민국 제 1호 갱스터 래퍼의 출현'이라는 선정적인 포장을 하는 매체도 있었다. 이제는 폭력 전과를 상업음악의 마케팅 요인으로 이용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TV 휴먼 다큐물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필자가 취랩을 접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아주 오랜만에 '함석헌'이라는 이름을 검색창에 넣었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를 재해석한 현대의 비폭력 저항운동가이자 사상가로 '한국의 간디'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1901년에 태어나 1989년 별세한, 20세기를 관통하는 대중의 양심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은 함석헌이라는 검색어에 대해 취랩에 관한 뉴스기사를 토해냈다. 그가 수감 중 감옥에서 함석헌 선생의 책을 읽고, 씨알사상에 감명 받아 범죄의 세계와 절연하고 음악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항일운동에서 반독재 민주화투쟁까지 앞장서 실천했던 20세기의 사상가와 21세기의 전과자 래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흥미가 당겨 즉시 그의 음반을 사서 들었다. 놀랍기 그지없었다. 취랩의 음악은 날 것 그대로다. 그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그대로의 암울한 삶이 현대의 시(詩)인 랩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첫 앨범에 20곡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의 음악을 알게 되자 이번에는 그 자신이 궁금해졌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를 인터뷰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연락처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직접 노래하지만 또한 자신의 앨범을 낸 씨알레코드 대표이기도 하다.

어렵게 매니저이자 형제로 부르는 지인의 연락처를 구해 드디어 장장 두 시간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는 랩을 무기로 노래하는 21세기의 음유시인이자 씨알들의 삶을 음악으로 대변하는 날 것 그대로의 철학자라고.

취랩은 실제로 조직폭력배 생활을 했고 수감된 이력이 있어서 데뷰 당시부터 화제가 됐다. 그의 복잡한 인생 역정은 곧 영화로 만날 수 있다.
취랩은 실제로 조직폭력배 생활을 했고 수감된 이력이 있어서 데뷰 당시부터 화제가 됐다. 그의 복잡한 인생 역정은 곧 영화로 만날 수 있다.
▶ "함석헌 선생은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자 나의 랩 스승"

# 취랩 김대룡과의 인터뷰

- 올해 1집 앨범을 출시했다. 노래에 욕설이 많고 반사회적 내용들이어서인지 '19금'으로 발매됐고, 모두 방송금지다. 취랩 스스로의 평가는 어떠한가? 또 음악수용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만족한다. 사실 1집은 상업적 계산으로 낸 앨범이 아니다. 인생막장의 경험에서 터져 나온 노래들이고, 죽기 전에 속에 쌓인 말들은 다 쏟아내고 죽자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앨범 발매 후 노래를 들은 분들의 반응에 더 놀랐다. 많은 공감이 쏟아졌다. '19금'이지만 내 노래 중 '증오에서 삶으로'라는 곡을 들은 초등학생이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불우한 가정환경의 아이인 듯한데 '취랩 형의 노래를 듣고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너무 거친 욕설들로 인해 노래의 진정성이 오해받지 않을까 우려했었다. 하지만 내 방식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데 의외로 욕이라든가 하는 형식에 집착하기 보다는 내 노래들의 진심을 받아주고 이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 향후 활동계획은 있는지? 2집 예정과 이후 취랩의 나아갈 방향은?

"1집은 원래 30곡을 두 장의 CD에 담으려 했었다. 감옥에서 써내려간 랩들이 100여 곡 된다. 수감생활 중 랩을 하며 재소자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이제 2집 작업에 들어갔고 내년 초여름 두 번째 앨범을 낼 계획이다."

- 1집을 통해 마음 속에 쌓인 이야기들은 많이 쏟아놓지 않았는가? 2집부터는 방송에서 허용하는 좀 더 대중적 노래들이나 상업적 성공을 염두에 둔 곡들을 낼 생각은 없는지?

"방송을 꼭 해야 한다거나 꼭 안해야 한다거나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는다. 물론 방송에도 나가고 싶고, 상업적으로 성공하고도 싶고, 과거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싶다. 부인하지 않겠다. 음악인으로 고려해볼 수 있는 비즈니스 전략도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취랩'의 정체성은 만들어져 있는 것이고, 2집, 3집이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랩이 그때그때 경험과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따뜻한 노래, 행복한 노래를 만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나는 나이기에 결코 내가 아닌 것으로 포장된 노래, 거짓으로 꾸민 음악을 단지 성공이나 돈 때문에 하지는 않을 것이다."

MC명 '취랩'은 수감시절 취사장에서 일하면서 랩을 했기 때문에 동료 재소자들이 붙여준 별명인 '취사장 랩퍼'의 줄임말이다.
MC명 '취랩'은 수감시절 취사장에서 일하면서 랩을 했기 때문에 동료 재소자들이 붙여준 별명인 '취사장 랩퍼'의 줄임말이다.


▶ "죽기 전에 속에 쌓인 말들은 다 쏟아내고 죽자는 심정"


- 당신의 전과이력이나 수감경험은 호기심의 대상이 될 법하다. 당신의 경험 중 가장 근원적인 것은 어떤 것이었나?

"할머니가 키워주셨기에 할머니와 나의 관계는 유별났다. 그런데 수감 중 돌아가셨다. 매주 면회를 오던 작은 고모님도 오랫동안 그 사실을 말해주지 못했다. 아마 크게 사고를 칠 거라고 생각했겠지. 교도소에서 불교집회에 나갔었는데 결국 스님을 통해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 미칠 것 같았지만 할머니가 원하는 것은 내가 나를 극복하고 늘 기대하셨던 훌륭한 손자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취랩은 군번줄 같은 체인 목걸이에 할머니의 초상이 음각된 펜던트를 걸고 있었다.)

- 당신이 힘들었을 때 음악이 구원의 길이 된 것 같다. 혹시 영향을 받은 국내외 뮤지션이 있는지? 있다면 누구이며 어떤 영향을 받았나?

"미안하지만 그 질문은 부정해야겠다. 앞서 말했듯 교도소에 갇혀 사랑하던 할머니의 죽음을 접하고 내 인생의 실패를 괴로워하며 미칠 것 같을 땐 음악이 구원이 아니었다. 다 때려치우고 세상을 파괴하고 나도 죽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때 함석헌 선생과 그의 씨알사상을 접했다. 그것이 나를 변화시켰다."

- 참 신기한 일이다. 나도 선생 자료를 찾다가 당신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나? 그가 당신에게 준 영향은 무엇인가?

"감옥에서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양철학을 접하고, 동양철학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럴 듯한 철학자가 없을까하는 궁금정이 생겼다. 신문에서 함석헌 선생에 관한 기사를 읽고 고모님께 책을 부탁했다. 함석헌의 철학을 접하고 난 깜짝 놀랐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아무도 우리 역사를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던 놀라운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늙은 갈보의 노래'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함석헌이 나에게 랩으로 말하고 있는 경험을 했다. 함석헌 선생이 나의 랩 스승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존심이 강해 누굴 존경하거나 동경한 적이 없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존경하는 인물은 함석헌 선생이 유일하다. 재소자들과 그의 책을 돌려가며 읽었다. 출소할 때 500여 권이 되는 책을 리어카에 실어 나왔는데 함석헌의 책만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오히려 밖에 나와 앨범 출시하고 놀랐던 것은 좋은 대학 나온 기자양반들이 함석헌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의아했다. 어떻게 그를 모르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것은 처음이다."



▶ 출판과 영화로도 만나게 될 '취랩'

취랩의 노래들에는 고통 받는 약자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우는 아이들, 가난에 찌들어 세상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 전과자라는 낙인에 사회에서 두 번 죽는 이야기, 무기수, 또는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서 자식에게 버림받은 남자의 뒷모습 등.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즐겁고 아름다운 음악이 아닌 불편한 진실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21세기 한국판 레미제라블이기도 하다.

취랩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부모 대까지의 불행은 어쩔 수 없지만 이제부터 스스로 만들어갈 미래는 바로잡고 싶다고 한다. 그의 소박한 꿈이,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취랩에게 자신의 안일한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몸으로 부딪쳐 얻은 경험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수많은 씨알들과 나누는 일이다.

그는 1집 앨범을 마무리하며 12월 30일, 31일 다른 래퍼들과 합동공연을 한다. 제작사는 그의 노래가 불법다운로드로라도 많이 공유됐으면 좋겠다는, 상업적으로는 터무니없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그의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을 뚫고 빛의 세계로 나오고자 몸부림치는 사나이, 취랩의 이야기는 출판과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최영일/ 문화평론가 vincent20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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