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 배우 ‘손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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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0일 17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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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순함과 오해의 세칭(世稱) 사이에서, 손예진을 보다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개봉 2주차가 지나는 순간이었다. 길고 긴 긴장감의 끝은 기어이 탈진으로 육신을 내몰았다.

그러나 지치고 지친 심신의 아픔이란 배우로서 각각의 고비에서 겪어온, 혹은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끝없이 겪어내야 할 혹독하지만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이다. 그 시련이 혹독한 만큼 배우로서는 더 소중한 경험일 테고 어찌 보면 숙명이기도 하다.

배우들이 자신의 작품 속 캐릭터에 온전히 녹아들어가 혹은 깊고 깊게 빠져들어 한동안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표현….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밖에 없는 오롯한 배우의 현실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생활인으로서 밥벌이라고 할 때, 프로페셔널로서 전문적이고 숙련된 기능이라고 할 때, 인간으로서 전할 진심이라고 할 때, 이 말은 순전한 사실이다.

'백야행' 개봉 직후 탈진한 손예진

적어도 카메라 앞에서 그들은 배우가 아니다. 캐릭터 그 자체이다.

캐릭터의 삶을 그대로 살아내지 않을 때, 살아내지 못할 때 배우는 이미 배우의 자격을 잃는 그리고 스스로 놓아버리는 셈이다.

지난 11월19일 개봉한 영화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 감독 박신우·제작 시네마서비스, 폴룩스픽쳐스)의 손예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올해 3월부터 3개월가량을 꼬박 '백야행' 속 미호로 살았던, 그리고 몇 달 동안 촬영을 준비하고 개봉하기까지 피 말리듯 고독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그녀는 사실 촬영의 순간에도 심신의 피곤함을 고스란히 견뎌내야 했다. 몸은 실제로 아팠고 어쩔 수 없이 촬영이 미뤄지기도 했다.

연기력을 갖춘 여배우를 논할 때 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손예진'이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2008)' 중 한 장면
연기력을 갖춘 여배우를 논할 때 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손예진'이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2008)' 중 한 장면


'백야행'의 기획자 겸 제작자인 폴룩스픽쳐스 안은미 대표의 증언이다.

"4월 중순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이던 때였다. 손예진의 소속사인 바른손엔터테인먼트 김민숙 대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예진이가 많이 아프다'면서 촬영을 미뤄달라는 요청이었다. 김 대표는 내가 행여라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손예진의 집으로 와달라고 했다. 거기, 탈진한 채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의 손예진이 누워 있었다. 촬영은 미뤄졌다. 그런 아픔은 데뷔 이후 처음 겪는 것이라고 했다."

안 대표는 말을 이어갔다.

"이틀 가량 촬영 일정이 연기됐다. 기어이 촬영장에 나온 손예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카메라 앞에 나서 장면 장면을 소화했다. 그리고 다시 쓰러졌다. 당시 '백야행' 촬영은 그 반복이기도 했다. 하루 더 쉬어가자고 했을 때, 손예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쉴 수 있지만 수십 명의 스태프와 동료 배우들은 어쩌느냐'고…. 난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 말이 나올 줄 미처 알지 못했다"는, 그것도 "그녀의 입에서", 안 대표의 그 때까지 시선은 어쩌면 대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중은 그녀를 그저 청순한 듯, 새침한 듯 보이는 여배우로서만 바라봐왔던 건 아닐까.

개봉 이후에도 극장 무대 위에 올라 관객을 연거푸 만나며 미호로서 나섰던 긴장감. 탈진으로서 긴장감의 끝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백야행'은 그녀에게 성숙한 아픔으로 기억될 필모그래피의 최신판일 터이다.

모두가 "최적의 캐스팅이다"고 동의한 단 하나의 여배우

영화는 14년의 시간을 오가며 살인사건과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버무림 속에 펼쳐놓았다.

영화는, 14년 전 어린 시절 가슴에 깊이 팬 고통의 생채기를 지워버릴 수 없는 두 남녀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리며 처연한 눈빛 속에 감춰진 한 여인의 절박한 욕망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팜 파탈'로 통칭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여인의 캐릭터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결코 지워낼 수 없는 과거의 고통에서 헤어나고자 14년 동안 자신을 지켜준 남자에게 욕망의 이름으로 다가서는 여자. 그렇기에 자신을 더욱 철저히 감춰야 하는 아픔은 더욱 크기만 하다.

'백야행'의 미호 역으로 손예진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원작이나 시나리오에 묘사된 여인의 캐릭터로서 그녀가 '딱이다'는 생각은 무리가 아니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최적의 캐스팅이었다.

조승우와 호흡을 맞춘 2003년 영화 '클래식' 그는 이를 통해 영화와의 강고한 인연을 시작했다.
조승우와 호흡을 맞춘 2003년 영화 '클래식' 그는 이를 통해 영화와의 강고한 인연을 시작했다.


손예진은 일찌감치 2005년 영화 '작업의 정석'에서 얄미울 만큼 내숭의 극치를 드러내며 순수해 보이는 얼굴과 절묘한 대비로써 관객에게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선사한 이력이 있다.

말 그대로 이제는 제법 지겨워질 법한 표현이기도 한 '청순함의 대명사'처럼 그녀를 받아들이던 대중에게 손예진은 그래서 더욱 얄밉지만 품고 싶은 캐릭터로서 다가갔다.

그 이전 2001년 MBC 드라마 '맛있는 청혼'으로 데뷔하며 '신성(新星)의 탄생'을 예고한 손예진은 '가을동화' '선희 진희' '대망' 등의 드라마로 청순한 캐릭터의 이미지를 굳혀갔다.

영화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취화선' '연애소설'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외출'은 그런 이미지의 소비라는 측면에서 그녀를 캐스팅 1순위에 올려놓곤 했다. 물론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와 같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없지 않았지만 이는 기존의 그녀가 지닌 혹은 뿜어낸 이미지의 매력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손예진은 2006년 SBS 드라마 '연애시대'를 통해 당당한 '돌싱' 역할을 연기하며 더욱 세련된 이미지를 강화했다. 영화 '외출'로서 좀 더 깊어진 연기력을 선보인 그녀는 '작업의 정석'을 거쳐 2008년 '무방비도시'를 기점으로 강렬한 캐릭터로서 관객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매 작품마다 파격적으로 성장해 가는 '괴물'

'무방비도시'의 소매치기 조직을 이끄는 리더라는 역할이 그녀의 것이 되리라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터였다. 스모키 메이크업의 얼굴 어느 한 구석엔가 감춰져있던 카리스마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데에도 그녀는 주저함이 없었다.

지난해 '아내가 결혼했다'를 통해서는 두 명의 남편을 '거느린 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고, "평생 자기만 사랑할 자신이 없"다는 '도발적'인 캐릭터를 무난히 소화해냈다. 결국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의 영광을 안으며 손예진은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미지에서 무난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만난 '백야행'. 이 영화는 그녀의 10년 필모그래피에서 정확히 열 번째 작품으로 기록된다.

"쉽지 않은 연기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고통스런 연기에 대한 욕심이 강했던 것 같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아픔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또 그렇게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순수한 듯해도 내면에 아픔을 지닌 단선적이지 않은 캐릭터다. 어렵고 힘겨웠다."

영화제의 단골 주인공 손예진. 그러나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그의 노력은 가끔 대중의 오해를 사기도 한다.
영화제의 단골 주인공 손예진. 그러나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그의 노력은 가끔 대중의 오해를 사기도 한다.


마치 여배우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듯, 손예진은 '백야행'의 미호처럼 담담했다.

"생각보다 큰 어려움" 속에서 "그저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자신의 상황이 답답했던 그녀는 순간순간의 절망 속에서 "정말 처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것은 배우로서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배우 인생의 초기 예고편으로서 호되게 겪은 통과의례였다.

10편의 영화를 대중에게 선사하며 "때로 완벽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고, 그래서 모든 걸 "혼자 다그치며 삭히면 되는 줄 알았다"는 그녀는, "마치 살얼음을 걷는" 현실 속에서 "데뷔 이후 10년 동안 (대중의) 신뢰감을 쌓아도 내 마음 같지 않은 것들이 주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자신의 "슬프고 아픈" 모습을 드러내기 싫었던 만큼 겪어야 했던 가슴 허한 느낌….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자신의 이미지로서 지탱하는 삶의 존재로 배우란 그렇게 외로운가보다. 아니, 외로워야 하는 건지 모른다.

"포장할 것이라면 완벽하게 하고 싶다"

"여배우로서 사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며 웃지만 그 웃음 뒤에서 한 자락 살짝 배어나오는 외로움을 전하는 손예진.

청순함을 욕망하는 대중의 시선은 이제 그녀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 속에 숨겨진 "슬프고 아픈" 구석을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당당하게 드러낼 줄 알게 된 건 아닐까?

다만 그 드러냄 역시 포장이 아니냐는 오해 아닌 오해에 시달릴 수 있을 터. 지금까지 대중이 욕망한 손예진이 그러하다면 다음의 말은 그런 오해 역시 대중의 또 다른 이기적 욕망임을 말해주는 것이니 이제 그 시선을 거두는 건 어떨까?

그래서 그 시선으로 손예진을 더 이상 옥죄지 말기를. 배우란 태생,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지언정 선입견의 시선으로 손예진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기를 말이다. 그녀가 내게 던진 이 표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포장이 필요하다면 어디까지나 대중 앞에서일 뿐이다. 그렇다면 완벽해야 하지 않겠느냐!"

# 인터뷰

- '백야행'은 당신에게 어떤 영화인가?

"손예진이란 배우에 대해 좋게 평가해주는, 신뢰를 보내는 분들이 더 생겨나는 데 대한 행복한 책임감을 갖게 해줬다. 특히 내 10번째 영화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 미호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미스터리한 인물로 보인다. 어떤 캐릭터보다 힘겨웠을 듯하다.

"쉽지 않은 연기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고통스런 연기에 대한 욕심이 강했던 것 같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아픔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또 그렇게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쉽게 와 닿지 않는 아픔과 느낌을 표현해야 했다. 워낙 원작소설이 유명한 작품이기도 해서 자칫 '잘해야 본전'일 거란 생각도 조금은 했다. 더욱이 미호라는 인물로 살면서 정신적인 고통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현실은 더했다. 정말 어렵고 힘겨웠다. 촬영 내내 고통스러웠다."

- 그래서 아팠나보다.

"정말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너무 힘들었다. 상상치 못한 아픔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을까, 혼자 절망에 빠진 적도 있다. 처음으로 아팠다. 결국 그 아픔을 폭발시킬 때, 아물지 못하고 곪았던 내 안의 어떤 것들이 터져나가는 듯했다."

'백야행'에 대한 소감을 밝히는 손예진. 극중 캐릭터 '미호'에 흠뻑 빠져있던 그는 또 한번 변신을 꿈꾼다.
'백야행'에 대한 소감을 밝히는 손예진. 극중 캐릭터 '미호'에 흠뻑 빠져있던 그는 또 한번 변신을 꿈꾼다.


- 처음으로 아팠다?

"그렇지 않은 척, 완벽한 척하며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동안, 편하게 가도 되는 걸 혼자 다그치면서 말이다. 스스로 힘들게 하는 스타일인가보다. 삭히면 없어지는 줄 알았다. "

- 마치 여배우로서 당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 살얼음을 걷는 느낌?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인데 (마음이) 다칠 때도 많다. 지난 10년 동안 신뢰감을 쌓았다 해도 내 맘 같지 않은 것들이 주는 아픔이 있다. 여배우로서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은가보다."(웃음)

- 배우로서 살아가기가 힘든가.

"어디, 모든 직업이 쉽겠나. 당사자 각자에게는 가장 힘들 것이다. 그러나 (배우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벽을 쌓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다. 있는 그대로를 얘기해도 오해를 받곤 한다. 피곤해도 그렇지 않은 척,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말이다. 배우여서 사랑받지만 또 그 만큼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 많다."

- '아내가 결혼했다' 속 노출 연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백야행'과 관련한 언급에도 노출 연기에 대한 부분이 담기곤 한다. 그런 논란과 화제는 어떤가.

"처음에 '또 벗는다'는 식의 표현이 나오는 걸 보고 너무 속상했다. 다시는 키스신도 연기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이슈가 되고 내가 연기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또 그런 이미지가 영화에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그런 영화도 아닌데 그렇게 비치는 게 속상하기도 했다. 마음이 좀 아플 뿐이다.(웃음) 그렇게 해서라도 내게 기회가 더 찾아온다면 숙명이려니 하겠다. (노출과 관련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나도 모르겠다."

윤여수 / 스포츠동아 엔터테인먼트부 차장 tadada@donga.com

[O2]제 2의 ‘올드보이’가 되지 못한 ‘백야행’
'아이리스' 포기한 손예진의 '백야행'이 의외로 잠잠했던 이유

▶ 히가시노 게이오의 대작 '백야행'
▶ 의외로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진 '요한'과 '미호'
▶ 원작을 담기엔 스크린이 너무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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