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방송작가 김수현 "주제는 무슨?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

  • 입력 2002년 3월 3일 17시 38분


《드라마 작가의 대모(代母) 김수현을 만나러 가는 길은 긴장됐다.

최고 평균 시청률(59.5%·1992년)을 기록한 MBC ‘사랑이 뭐길래’를 비롯해 ‘목욕탕집 남자들’(95년·KBS2) ‘청춘의 덫’(78년·99년 리메이크) 등 수많은 히트작의 작가인데다 ‘공식’ 인터뷰를 극도로 꺼리기 때문이다. 그는 또 극중 출연자의 틀린 대사 한 마디도 잡아낼만큼 깐깐한 성격으로 기자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김수현 작가는 2일 첫방영한 새 드라마 ‘내사랑 누굴까’(KBS2)로 1년 9개월만에 복귀했다. 서울 여의도 KBS별관에서 이 드라마의 성공을 기원하는 고사가 있던 지난달 27일, 기자는 안면이라도 터놓을 요량으로 무작정 현장을 찾았다. 》

신분을 밝히자 경계하는 눈빛부터 언뜻 비쳤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헛걸음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박정수 여운계 등 출연진과 고사떡을 나눠 먹는 자리에 슬쩍 걸터 앉았다. 미소를 지으며 안부를 묻자 그는 대뜸 “나이가 몇이냐”고 되묻는다. “올해 스물 일곱입니다.” “좋∼을 때야. 인상이 훤하네.”

인터뷰가 의외로 부드럽게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번 드라마의 주제는 뭔가요?

“주제는 무슨 주제.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왜 김 선생님 드라마엔 항상 못된 딸이 등장하죠? 이번 드라마에도 이승연 이태란씨가 엄마 말이라면 지겹게 안듣는 딸로 나오던데….

“딸년들이 대부분 못되지 않았어? 엄마한테 아픈 말만 골라서 하잖아.”

그러자 박정수 여운계 등 ‘과년한’ 딸을 둔 중년 여자 연기자들이 앞다투어 한마디씩 거들었다.

“우리 딸은 있잖우, 내가 살이 조금만 쪄도 ‘할머니 되고 싶냐’며 면박주는 거 있지. 같은 말도 좀 이쁘게 할 순 없는거유?”(박정수)

“그게 다 애정이 있으니까 그런거지. 관심 없어봐. 그런 말 하나.”(여운계)

한동안 ‘얄미운 딸’에 대한 ‘아줌마’들의 수다가 이어졌다.

-출연자가 토씨 하나도 틀리면 안될 만큼 무섭고 깐깐하다고 들었습니다.

“대사의 음정, 장단 하나도 틀리면 안돼. 대사의 뉘앙스가 죽어버리거든. 그래서 머리 나쁜 연기자는 내 드라마 출연 못해. 난 나를 안 무서워하는 사람은 싫어. 나도 마찬가지로 쉬워보이는 사람이 싫고.”

주변에서 누군가가 “일할 때만 그렇지 알고 보면 김 선생님만큼 여자다운 분도 없다”고 하자 “나 여자 아니야”라고 웃으며 쏘아붙인다.

-요즘 몸값 비싼 연예인들이 맘대로 행동해 제작진을 당황케하는 경우도 있는데….

“난 그런 거 절대 못봐. 비싸면 비싼 값을 해야지. 또 하나, 싸도 비싼 값을 해야해. 그래야 기회가 오는 거야.”

-최근 MBC 주말극 ‘여우와 솜사탕’이 ‘사랑이 뭐길래’를 표절했다고 선생님이 소송을 제기했는데요.

“그건, 말이 안돼. 해도 너무 하잖아. 내가 드라마 초반 제작진에 항의했더니 ‘사랑이 뭐길래’는 이미 드라마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나? 아니, 내가 무슨 세익스피어냐? 웬 고전? 사람들은 이번 드라마의 경쟁 프로인 ‘여우와 솜사탕’을 깎아 내리려고 때맞춰 고소한 거라고들 하대. 왜 그렇게 치사해? 내가 이 바닥에서 30년 있었는데 내 성격을 그렇게 몰라?”

-담배를 많이 피우시는데(인터뷰 내내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건강은 어떠세요?

“나 폐암 걸렸다며? 1년만 쉬면 꼭 그런 유언비어가 돌더라고.”

올해 예순인데도 그의 톡톡 튀는 말은 나이를 모르게 했다.

-삶을 반추해볼 때, ‘행복한 삶’이란 무엇이던가요?

“정답은 없는 거야. 나도 인생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내 삶이 행복했다고 자부해. 다 그런거야.”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자 그는 처음의 깐깐한 모습을 벗고 ‘엄마’같은 푸근함으로 다가왔다. 그는 기자에게 사랑의 선택이나 인생살이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사랑을 선택할 땐 조건보다 사람이 먼저야. 그렇지만 요즘처럼 불확실한 시대에 그 사람이 어떤지 누가 확신할 수 있겠어. 결국 ‘인연’을 믿는 수 밖에. 요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망가졌어. 정신적으로도 너무 피폐하고….”

제대로 말 한 번 못붙이고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이 싹 가신채 김 작가와의 ‘수다’는 2시간동안 이어졌다. 헤어지면서 그는 “아이고, 오늘은 힘이 없어 별로 재미있게 못 해준 것 같네”라며 친절한 웃음을 건넸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김수현씨는

△43년 충북 청주 출생

△65년 고려대 국문과 졸업

△68년 MBC 라디오드라마 극본 공모에 ‘저 눈밭에 사슴이’ 당선

△‘새엄마’(72년) ‘신부일 기’(75년) ‘청춘의 덫’ (78년·99년 리메이크) ‘사랑과 진실’(84년) ‘사 랑과 야망’(87년) ‘배반 의 장미’(90년) ‘사랑이 뭐길래’(91년) ‘산다는 것은’(93년)‘작별’(94년) ‘사랑하니까’(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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