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TV프로의 숨은 감초, 방청객도 '프로' 시대

  • 입력 2000년 12월 5일 18시 51분


# 오후 4시14분, MBC D스튜디오.

“언니들, 이쪽으로 오세요.”

20대 여성 100여명이 우르르 스튜디오로 들어온다.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전파견문록’ 녹화현장.

‘방청객 동원회사’인 세진기획에서 나온 인솔자가 무대위로 올라가 방청객을 한줄씩 앉혔다.

“코트나 검정색 옷, 패딩옷은 벗어주세요.”

맨 앞줄 제일 가운데 한 의자만 비워놓고 10여분만에 자리배치가 끝났다. 비워둔 자리에는 구성작가 한명이 MC의 멘트와 진행 요령을 적힌 16절지 종이를 들고와 앉았다.

“자아, 방송녹음용입니다. 함성박수 준비!”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우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120명 소리가 이게 뭡니까. 다시!”

“우와아아∼” 더 큰 함성과 함께 우렁찬 박수소리.

“아니, 여기가 야구장입니까. 맑은 목소리로 내 주세요. 다시!”

#방청객 웃음에도 ‘색깔’이 있다?

오락프로그램 스튜디오 녹화에서 방청객은 출연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된지 오래다. 방청객들의 반응이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프로’ 방청객들이 생겨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프로그램 성격에 따라 방청객 선정 기준도 달라진다. ‘전파견문록’의 방청객은 모두 20대. 10대는 목소리가 너무 갸날프고 40, 50대 ‘아줌마’는 목소리가 탁해 일반적으로 오락프로그램에는 20대가 무난하다.

보통 ‘뒤는 오디오, 앞은 비디오’라는 말도 있을 만큼 앞쪽에는 예쁜 여성이 앉는다. 남자 방청객은 없다. 드물게 남자들도 방청객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찾아오지만 오락프로그램에서는 아예 빼버린다. 남자가 끼어있을 경우 여자 방청객의 함성이 제대로 나오지 않기 때문. 단, 토론프로그램의 경우 남녀 방청객의 비율을 4대 6정도로 맞춘다.

# 오후 4시43분.

MC 이경규 등장. “연습 한 번 해볼까요” 하며 “퀴즈!” 하자 방청객들이 “순수의 시대” 하고 받았다. 이경규가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동그랗게 오무려 ‘굿’ 표시를 했다.

녹화가 시작됐다. 실제 프로그램 순서와 달리 중간 코너인 ‘도전! 참 잘했어요’를 먼저 녹화하고 오프닝은 나중에 찍었다.

녹화 도중 별로 웃기는 장면이 아니었는데 옆에 앉아있던 한 방청객이 몸을 젖혀가며 웃어댔다. “(방청객을) 많이 해봤느냐”고 묻자 “많을 때는 일주일에 네 번까지 한다”고 말했다.

#‘프로’ 방청객의 웃는 법.

카메라가 방청객 뒤에서 스튜디오를 전경으로 잡으면 화면에는 방청객 허리까지 나온다. 뒤에서 보면 아무리 크게 웃어도 그냥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몸동작을 크게 하고 고개를 젖히거나 몸을 좌우로 흔들며 ‘확실하게’ 웃어줘야 한다.

‘프로’들의 좌우명은 ‘늘 처음처럼’. 방청석 진행을 4년째 하고 있는 김수정씨는 “NG가 나서 똑같은 농담을 몇 번씩 듣더라도 처음처럼 웃을 수 있는 것이 방청객에게 제일 중요하다”이라고 말했다.

# 오후 5시 15분.

세트를 바꾸고 ‘퀴즈! 순수의 시대’ 녹화에 들어갔다. ‘순수의 시대’는 방청객의 반응이 중요한 코너. 출연자들은 방청객을 쳐다보며 얼굴 표정과 반응에서 ‘정답’을 읽어내려 애쓴다.

“정답에 가까워져도 티내면 안된다”는 교육을 미리 받은 터라 방청객들은 출연자가 ‘오답’을 댔을 때도 알아서 함성박수를 지르고 정답이 나왔을 때도 ‘에이∼’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같은 반응에 출연자들이 계속 헷갈려하자 MC 이경규가 만족스러운 듯 한마디 던진다.

“최고의 방청객입니다!”

# 방청객 아르바이트의 모든 것.

현재 활동중인 ‘방청객 동원업체’는 4개. 보통 1년 단위로 방송국과 계약한다. 패션잡지나 인터넷에 ‘방청객’ 모집 광고를 내기도 하지만 대부분 알음알음으로 찾아온다.

방청객 아르바이트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각 프로그램 방청객의 약 30%.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뛰면 하루에 2∼3개 프로그램까지 가능하다. 이들이 받는 일당은 1인당 6천원. 아침 생방송과 오후7시 이후 저녁녹화는 가격을 두배로 쳐주기 때문에 1만2000원을 받는다.

방청객들이 제일 꺼리는 프로는 코미디. 다른 프로그램은 3시간내에 끝나지만 코미디프로는 녹화도중 무대 세트와 분장을 많이 바꿔 4시간이 넘기 일쑤인데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성박수를 해야 하기 때문.

# 저녁 7시8분

녹화가 끝났다. 출연자들이 다 나가도 방청객은 앉아있다. PD가 마이크로 “수고많았습니다” 하자 그제서야 일어났다. 일사분란하게 두 줄로 서서 MBC 뒷문 로비에 모였다.

인솔자가 “잔돈 미리미리 준비하세요” 라고 하자 다들 익숙하게 천원짜리를 4장씩을 꺼냈다. 만원짜리 한 장과 잔돈을 맞바꾼 이들은 “내일은 SBS” 하고 약속을 정한 뒤 어둠 속으로 삼삼오오 흩어졌다.

<강수진기자>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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